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규(白圭). 병조참판 이육(李陸)의 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좌랑·태안군수를 지냈다.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할 즈음,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礻+谷)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해 1623년 3월의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정 과정에서 주도 세력인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瑬)의 우유부단한 처사에 크게 반발하면서 불화가 생겨, 반정 뒤에 겨우 한성부판윤이 되자 불만이 많았다.
1623년(인조 1) 포도대장을 지낸 뒤 평안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평안도 영변에 출진해 군사 훈련에 힘쓰는 한편 그 지방의 성책(城柵)을 보수해 진의 방비를 엄히 하였다.
이는 당시 후금과의 국제 관계가 긴박해지면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해 윤10월 반정에 참가한 공신들의 공훈을 책정할 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의 첫째가 되었다.
1624년 정월에 외아들 이전(李栴)·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어 서울에서 선전관과 의금부도사 등이 이괄의 군중(軍中)에 머물던 아들 이전을 붙잡아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영변에 내려오자,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속한 행군으로 한때 서울을 점령, 기세를 떨쳤으나 곧 관군에 대패해 피신 중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무과 출신이었으나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