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李麟佐)의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이현좌(李玄佐)이다. 충청도 청주목 괴산군 송면(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출신이다.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9대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운징(李雲徵)이며, 아버지는 이홍덕(李弘德)이다. 어머니 창녕조씨는 조하주(曹夏周)의 딸이다. 부인은 윤휴(尹鑴)의 손녀 윤자정(尹紫貞)이다. 형제로는 웅좌(熊佐) · 준좌(駿佐) · 기좌(騏佐), 그리고 아명(兒名)이 기아(夔兒)인 막내동생이 있다.
이인좌의 집안은 할아버지 대에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집권하자,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좌 할아버지인 이운징이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귀양을 갔다. 훈련대장을 지낸 이운징의 형인 이의징(李義徵)도 먼 섬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에 사사(賜死)되었다.
1721년(경종 1)부터 1722년에 사이에 노론과 소론이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의 명분을 내세운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났다. 이후 실각하였던 노론이 영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집권하고, 앞서 노론 사대신(四大臣)을 무고한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 목호룡(睦虎龍)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자 이에 불만을 품은 자들과 이인좌 · 김영해(金寧海) · 정희량 · 박필현 · 심유현(沈維賢) 등이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1728년(영조 4) 음력 3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 연합해서 일으킨 것이다. 여기에는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명분으로 경상도 · 전라도를 비롯해 기호(畿湖) 지방까지 반란군이 결성되어 활동하였으며, 중앙의 금군 별장 남태징(南泰徵)과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사성(李思晟) 등이 가담하였다.
박필현(朴弼顯)과 심유현은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 목호룡의 형 목시룡(睦時龍) 등을 규합하고 갑술환국 때 몰락한 남인 집안의 자손인 이인좌 등과 손을 잡았다. 이인좌와 박필현은 1726년에 이인좌가 경상도 상주로 이주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또 함께 반란을 주도한 정희량(鄭希亮) 역시 남인의 명문가 출신으로 정온(鄭蘊)의 현손이다.
이인좌는 대원수라 자칭하고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을 점령하고,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여 목천 · 청안(淸安) · 진천을 거쳐 안성 · 죽산에 이르렀다. 이때 사도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해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26일에 친국을 받고 다음 날 대역죄로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능지처참되었다.
4월 9일에 이인좌의 부인 윤자정이 교형에 처해졌고, 4월 14일에는 아들 4명이 온성부(穩城府)와 회령부(會寧府)의 노비가 되었다. 이때 이인좌의 나이 34세였고, 네 아들인 중명(中明) 12세, 문명(文明) 9세, 화명(化明) 6세, 인명(仁明) 2세였다.
4월 16일에 충주목사 김재로(金在魯)가 이인좌의 표종제(表從弟) 조세추(曹世樞)를 체포하여 서울로 보냈다. 4월 19일에 영조는 몸소 숭례문 문루에 올라서 성공적으로 난을 진압한 오명항을 맞이하였다. 이때 1624년(인조 2) ' 이괄의 난'을 진압한 뒤 처음 시행한 선로포의(宣露布儀) · 헌괵의(獻馘儀) 의례를 다시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