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 고고자(鼓鼓子). 별제 정옥견(鄭玉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승지 정숙(鄭淑)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유명(鄭惟明)이다.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 · 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임해군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하여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德辨錄)』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을 반성하였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 · 이조참의 · 대사간 · 대제학 · 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장악을 공격하였다. 또 폐세자(廢世子: 광해군의 아들 祬)와 선조의 서자 인성군 공(仁城君珙)의 옥사에 대해 전은설을 주장, 공신들을 견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했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려서부터 당시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정인홍(鄭仁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전수받았다.
1607년(선조 40) 정인홍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의혹을 일으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를 탄핵하다가 처벌을 받자 정인홍을 위해 변호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 때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를 두고 비록 의견이 달랐지만 정인홍에 대한 의리는 변하지 않아 인조반정 후 정인홍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격화된 당쟁 속에서 그와 그의 후손들은 남인으로 처신했고, 정인홍이 역적으로 심하게 몰리면서 정구(鄭逑)를 사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현실대응 자세는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것은 영창대군 옥사 때의 상소나 대청관계에서의 척화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 후기 숭명배청사상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김상헌(金尙憲)보다 크게 추앙받지 못한 것은 색목(色目)이 노론이 아니었는데 연유한다. 허목(許穆) · 조경(趙絅)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李滉)-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생가는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