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현(?~1728)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경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동생으로, 1728년(영조 4)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 때 반란 세력을 대표하던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담양부사(潭陽府使) 재직 당시에 박필현(朴弼顯) 등과 호남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조사받던 중 물고(物故)되었다.
심유현의 아버지는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에 봉해진 심호(沈浩)이다. 어머니는 고령 박씨 박빈(朴鑌)의 딸인데, 그녀는 영조 연간 소론을 대표하던 박문수(朴文秀)의 내종숙(內從叔)이기도 하다. 심유현의 누이는 경종의 세자 시절 세자빈으로, 후일에 단의왕후로 봉해진 인물이다.
1718년(숙종 44) 세자빈이 사망하자 습렴(襲殮) 때 참여하였고, 같은 해 8월에는 왕세자 가례도감의 낭청으로 차출되었다. 1722년(경종 2) 5월 현릉 참봉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혜릉석물추배도감(惠陵石物追排都監)의 감조관(監造官)으로 차출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 사복시 주부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충훈부 도사로 부사공신(扶社功臣)을 책록할 때 녹훈도감 낭청으로 차출되었다.
1724년(경종 4) 한성부 판관, 해주 판관, 예빈시 직장, 사옹원 주부 등을 지냈다. 같은 해 8월 경종이 승하할 때 입시하여 죽음을 확인하는데 참여하였고, 목욕할 때도 입시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뒤인 1724년 9월 영천(永川) 군수에 제수되었고, 1726년(영조 2)에는 부사과(副司果)와 세자익위사 익위를 거쳐 한성부 판관을 지냈으며, 1728년(영조 4)에 담양 부사에 제수되었다.
담양 부사로 재직할 때인 1728년(영조 4) 1월 담양부 화약고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화재로 창고가 불에 타는 것은 물론이고, 화약과 화전 철대(火箭鐵臺)와 화전 철정(火箭鐵釘), 철추(鐵錐) 등이 불에 탔다. 이 일로 심유현은 전라 병사 조경(趙儆)의 장계로 파직되었다. 후일 무신란이 진압된 후에 화재는 거짓일 뿐, 심유현이 이를 기회로 반란을 위한 화약을 훔쳤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1728년 3월 무신란이 일어났을 때, 심유현은 담양 부사로 태인 현감 박필현(朴弼顯)과 무장(茂長)에서 귀양 생활을 하던 박필현의 종형 박필몽(朴弼夢) 등과 모의하여 반란을 꾀하였다. 그러나 심유현 등이 이끄는 반란 세력은 전주의 삼천(三川)에서 궤멸되면서 체포되었다. 경종의 처남으로, 경종 승하 시에 입시했던 심유현이 경종의 죽음을 의문시한 발언을 하였는데, 이것이 무신란을 일으킨 반란 세력에게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체포되어 조사받은 이유익(李有翼)은 심유현의 발언이 인심을 선동하여 역모에까지 이르렀다고 한 바 있다.
심유현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국왕의 친국(親鞫)에서 문초를 받았고, 같은 해 4월 4일 물고되었다. 반란이 진압된 뒤인 4월 14일 이인좌(李麟佐)·이웅보(李熊輔)·박필현·이사성(李思晟)·정희량(鄭希亮)·박필몽·남태징(南泰徵)·민관효(閔觀孝)·이유익 등과 함께 10명의 역적 괴수[逆魁]로 규정되었다.
1908년(순종 1)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의 건의에 따라 죄명이 벗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