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에 급제하여, 1711년(숙종 37) 훈련원부정으로 참핵사(參覈使) 송정명(宋正明)과 함께 임시로 형조좌랑이 되어 청국인의 살해사건을 조사하였다. 그 뒤 전라우도수군절도사·경상도병마절도사·회령부사·함경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727년(영조 3) 평안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삼부초장(三部抄壯)이라는 군제(軍制)를 독자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듬해 김일경(金一鏡)의 당여인 이인좌(李麟佐)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격문을 사방으로 돌리고 정변을 기도할 때, 총융사 김중기(金重器), 금군별장 남태징(南泰徵) 등과 통모하여 병사를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영조가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함에 사실대로 자복하였다. 이듬해 3월 참형되었고 이사성의 처자도 또한 연좌되어 처형되었다. 이사성이 실시한 군제인 삼부초장도 이 해 5월 양서안무사(兩西安撫使) 조지빈(趙趾彬)의 주청에 따라 폐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