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산(靈山).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상장군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녹훈되고, 취산군(鷲山君)에 봉하여졌다. 정종·태종 연간에 예조전서·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등과 함께 종친간을 이간질하였다 하여 이화(李和) 등의 탄핵을 받아 강원도 원주에 유배되었으나 태종의 지우를 받아 자원부처(自願付處: 유배에 처한 죄인이 원하는 곳에 기거하던 제도)하게 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의정부·사헌부·사간원 등의 계속되는 탄핵을 받아오다가 그 해 11월 양주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는 태종이 좌명공신으로 후하게 사부(賜賻)하고, 조회를 사흘간이나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