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여림(汝霖). 손유례(孫有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손밀(孫密)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손순효(孫舜孝)이며, 어머니는 신자의(申子儀)의 딸이다.
1486년(성종 17) 식년시에서 생원에 급제하였고, 1492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과 홍문관의 수찬·부제학 등을 거쳤다. 1508년(중종 3) 형조참판이 되고, 이어 대사헌·한성부좌윤·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1512년 소릉(昭陵: 문종왕후 권씨의 능)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시키자는 논의가 조정에서 일어났을 때, 신용개(申用漑)·강혼(姜渾)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으로서 남곤(南滾)·심정(沈貞)·고형산(高荊山) 등과 함께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뒤에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1521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조판서로서 하존시사(賀尊諡使)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경기관찰사·한성부좌윤·예조참판이 되었다. 1528년 호조참판으로 향교에 제사를 드렸으며, 특진관(特進官)으로 학교교육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1530년 과거의 시험관이 되고, 이듬해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 때 나이가 많고 쇠약함을 이유로 치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532년에 우참찬을 지내고, 좌참찬을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공정하면서 정직하여 두루 벼슬을 거치면서도 의리에 합당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고, 가정에 거처할 때도 검소하였다. 시호는 희질(僖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