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현종 때 왕의 친위병으로 금군이 있었던 사실은 확인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조선시대 금군으로는 1407년(태종 7) 10월 종래의 내상직(內上直, 內廂直)을 내시위(內侍衛)로 고쳤다가 다시 내금위(內禁衛)로 고쳤는데, 오위(五衛)와는 별도로 무예가 특이한 자 190인으로 편성하였다.
왕과 가장 가까이에서 입직(入直)·시립(侍立)·호종(扈從)을 맡았으므로 선발에 있어서도 탁월한 무재(武才)는 물론, 왕의 신임이 중요하였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양반층 유음자손(有蔭子孫)의 업무자(業武者)가 이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어서 1409년에 왕의 신변 보호·왕궁 호위 및 친병 양성 등을 맡은 기병(騎兵) 중심의 친위군으로 겸사복(兼司僕)이 설치되었다. 겸사복에는 무재뿐만 아니라 용모·학식 등을 갖춘 자로서 양반·서얼·양민에 이르기까지 두루 선발되었다. 정원은 50인으로 특히 북계인(北界人)이 우대되었다.
또, 1492년(성종 23)에는 궁성 수비를 맡은 정원 50인의 우림위(羽林衛)가 설치되어 금군은 내금위·겸사복·우림위 등 삼청(三廳)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이들을 합칭, 금군삼청, 또는 내삼청(內三廳)이라 하여 왕의 친병으로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금군의 수는 늘어 1528년(중종 23)에는 600인을 넘었다. 때문에 그 가운데 100여 인을 방수군(防戍軍)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군량의 부족으로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게 되어 금군은 매우 용잡(庸雜)하였다. 그러나 난 후 1602년(선조 35)에는 그 수가 1,217인에 이르러 이들에게 2만여 석을 지급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 세력에 의해 호위청(호위청)이 설치, 이들이 새로 왕의 숙위를 맡게되어 본래의 금군인 내사청의 기능은 약화되었다. 그 뒤 1666년(현종 7) 금군청(禁軍廳)을 설치하고 금군삼청 소속 700인을 통합, 병조판서 겸임의 대장(大將)과 금군별감(禁軍別監, 종2품)을 두어 통할하게 하였다. 이 때부터 금군은 기병으로 편성되었으며 1755년(영조 31) 용호영(龍虎營)으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 뒤 금군을 선발하는 기준으로 철전취재(鐵箭取才) 합격자와 6품 이상 실직(實職)을 지낸 50세 이하자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1760년 금군 중 취재에 합격되지 않은 자를 골라 변원충군(邊遠充軍)한 것으로 보아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대전회통≫에는 금군으로서 비록 절충장군(折衝將軍)·가선대부(嘉善大夫) 등 당상계(堂上階)에 오르더라도 경질하지 않고 그대로 용호영에 배속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의 교련관(敎鍊官) 1인은 금군으로 차정(差定)하도록 규정하였다. 오위의 군제가 폐지된 뒤에는 그 관직만 군함체아직(軍銜遞兒職)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