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3책본, 8권 4책본, 불분권(不分卷) 6책본 등 다양한 필사본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괘인정사본(罫印淨寫本)으로 6권 3책본과 8권 4책본이 있다. 정조 연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정사본(淨寫本)으로 불분권(不分卷) 6책이 있다. 순조 이후 편찬된 것으로 보이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8권 6책 필사본의 구성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두에 정조의 어제서문(御製序文)이 실려 있다.
권1·2에는 시 506수, 권3∼5에는 소차(疏箚) 73편, 계(啓) 13편, 의(議) 15편, 권6에는 응제문(應製文) 4편, 서(序) 4편, 기(記) 3편, 발(跋) 6편, 잡저 6편, 책문 4편, 권7에는 제문 6편, 비장(碑狀) 14편, 쇄지(瑣識) 26칙, 권8에는 연행일기(燕行日記)가 실려 있고, 부록에는 봉풍릉군교서(封豊陵君敎書) · 영조묘정배향교서(英祖廟庭配享敎書) · 영의정추증교서(領議政追贈敎書) · 묘표 등이 수록되어 있다.
「논붕당소(論朋黨疏)」는 영조에게 탕평책(蕩平策)을 건의한 최초의 상소로, 내용면에서도 매우 구체적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붕당이 끼치는 큰 해독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시비에 진실성이 없다는 것, 둘째 인재 등용이 편협되게 이루어진다는 것, 셋째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는다는 것, 넷째 언로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 다섯째 염치를 모두 잃는다는 것이다. 정조도 서문에서 이 글이 오랜 고질에 독특하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음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임금의 명을 받아 지은 글인 응제문 4편 중에서 「장릉천장지(長陵遷葬誌)」는 왕실의 변천 과정을 자세히 논한 방대한 분량의 글이며, 「왕자봉성군시장(王子鳳城君諡狀)」은 봉성군(鳳城君)이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파로 희생된 과정을 기록하였는데,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쇄지는 저자의 일생에 걸친 신변잡기이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때의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고, 저자가 어영대장의 직위에 있을 때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 당시의 일도 자세히 적어 놓았다.
연행일기는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갔을 때 쓴 글이다. 1725년(영조 1) 5월 18일부터 같은 해 9월 28일까지 약 4개월에 걸친 일기이다.
『학암집』에는 조문명의 시문학이 수록되어 있어 그의 문학 세계를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다. 조문명이 붕당(朋黨)을 배척하고 탕평(蕩平)을 주도했던 인물인 만큼, 이 자료를 통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사건 등을 구체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