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구(汝久). 호는 손와(損窩).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명길(崔鳴吉)이고, 아버지는 최후량(崔後亮)이며, 어머니는 안헌징(安獻徵)의 딸이다. 최후원(崔後遠)에게 입양되었다.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아우이다.
1678년(숙종 4) 진사가 되고 16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몸집이 작고 차림이 초라하였으나, 사리판단이 정확하여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전국의 관찰사 중 제일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1721년(경종 1)부터 2년에 걸친 이른바 신임사화에서 소론이 승리하는 데에 큰 구실을 하였다. 1721년 10월 왕세제(王世弟: 뒤의 영조) 대리청정의 지시가 내렸을 당시 좌참찬으로서 왕을 만나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그것을 철회시키기도 하였다.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당시 소론4대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이러한 당색 때문에, 영조가 즉위한 뒤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복관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손와유고』 1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