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수 ()

이덕수의 서당집 중 권수면
이덕수의 서당집 중 권수면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홍문관수찬, 형조판서, 부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인로(仁老)
벽계(蘗溪), 서당(西堂)
시호
문정(文貞)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73년(현종 14)
사망 연도
1744년(영조 20)
본관
전의(全義,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
주요 관직
지평|홍문관수찬|이조좌랑|집의|간성군수|대사성|부제학|대사헌|이조참판|형조판서|부총관|개성유수
정의
조선 후기에, 홍문관수찬, 형조판서, 부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인로(仁老). 호는 벽계(蘗溪) 또는 서당(西堂). 이행건(李行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만웅(李萬雄)이다. 아버지는 참판 이징명(李徵明)이며, 어머니는 심약한(沈若漢)의 딸이다. 박세당(朴世堂) ·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선조의 덕으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문의현감으로 임명되었다. 경종이 즉위하자 지평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옮겼다. 그 뒤 홍문관의 수찬 · 부수찬 · 부교리 · 부응교와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 집의로 있을 때 임인옥사로 몰리게 된 호조판서 김연(金演)을 구하려다, 사간원으로부터 김창집(金昌集)과 같은 주1으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무마되었다. 이듬 해 보덕에 임명되었다가 간성군수로 나갔다.

경종이 죽자 이광좌(李光佐)의 추천으로 이진망(李眞望)과 함께 실록청당상에 임명되고 이를 계기로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1732년 경종의 행장을 찬진하고, 『경종실록』을 완성시켰다. 1734년 왕명을 받아 당나라의 『여사서(女四書)』를 한글로 풀이해 민간에 반포했다. 1741년부터 유수원(柳壽垣)의 참여 하에 『국조오례의』 수정작업에 착수했다. 1744년 이덕수가 죽은 뒤 이종성(李宗城)『국조속오례의』를 찬수했다.

내직으로는 대사성 · 대제학 · 제학 · 부제학 · 수찬 · 부수찬 · 교리 · 부교리 · 대사헌 · 동지의금부사 · 동지경연사 · 좌우부빈객 · 좌우참찬 · 이조참판 · 이조좌랑 · 이조판서 · 공조참판 · 공조판서 · 형조판서 · 부총관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1733년 개성유수를 지냈다. 1735년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문장이 출중해 홍문관과 예문관 관직에 여러 차례 올랐다.

성품이 조심스럽고 온후해 당론에 뛰어들지 않았다. 1737년 이현필(李顯弼)이 주2을 볼 때 영조를 비방한 사건으로 탄핵받았을 때나, 이광의(李匡誼)가 김복택(金福澤)의 일을 거론해 화를 입었을 때 이광의를 은근히 비호했다 하여 탄핵받았을 때도 무사했던 것은 이덕수의 이러한 성품으로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서로는 『서당집』 · 『서당사재(西堂私載)』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서당사재(西堂私載)』
주석
주1

역적의 무리. 우리말샘

주2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科擧) 과목.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박광용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