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덕으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문의현감으로 임명되었다. 경종이 즉위하자 지평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옮겼다. 그 뒤 홍문관의 수찬 · 부수찬 · 부교리 · 부응교와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 집의로 있을 때 임인옥사로 몰리게 된 호조판서 김연(金演)을 구하려다, 사간원으로부터 김창집(金昌集)과 같은 역당(逆黨)으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무마되었다. 이듬 해 보덕에 임명되었다가 간성군수로 나갔다.
경종이 죽자 이광좌(李光佐)의 추천으로 이진망(李眞望)과 함께 실록청당상에 임명되고 이를 계기로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1732년 경종의 행장을 찬진하고, 『경종실록』을 완성시켰다. 1734년 왕명을 받아 당나라의 『여사서(女四書)』를 한글로 풀이해 민간에 반포했다. 1741년부터 유수원(柳壽垣)의 참여 하에 『국조오례의』 수정작업에 착수했다. 1744년 이덕수가 죽은 뒤 이종성(李宗城)이 『국조속오례의』를 찬수했다.
내직으로는 대사성 · 대제학 · 제학 · 부제학 · 수찬 · 부수찬 · 교리 · 부교리 · 대사헌 · 동지의금부사 · 동지경연사 · 좌우부빈객 · 좌우참찬 · 이조참판 · 이조좌랑 · 이조판서 · 공조참판 · 공조판서 · 형조판서 · 부총관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1733년 개성유수를 지냈다. 1735년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문장이 출중해 홍문관과 예문관 관직에 여러 차례 올랐다.
성품이 조심스럽고 온후해 당론에 뛰어들지 않았다. 1737년 이현필(李顯弼)이 책문(策問)을 볼 때 영조를 비방한 사건으로 탄핵받았을 때나, 이광의(李匡誼)가 김복택(金福澤)의 일을 거론해 화를 입었을 때 이광의를 은근히 비호했다 하여 탄핵받았을 때도 무사했던 것은 이덕수의 이러한 성품으로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서로는 『서당집』 · 『서당사재(西堂私載)』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