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 ()

조선시대사
단체
조선시대, 광해군 대 집권 세력이었던 붕당의 한 정파.
이칭
속칭
대북(大北), 소북(小北), 중북(中北)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북인은 조선시대 광해군 대 집권 세력이었던 붕당의 한 정파이다. 동인은 분당 이후 임진왜란 종전까지 20여 년 동안 정국을 주도했는데, 주류는 퇴계학파, 비주류는 남명 · 화담학파였다. 동인 비주류 세력이었던 북인은 1589년 기축옥사 당시 서인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적극적인 의병 참여와 주전론(主戰論)의 제기를 통해 세력을 키웠다. 광해군을 줄곧 지지했던 이들은 광해군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집권 세력이 되었다.

정의
조선시대, 광해군 대 집권 세력이었던 붕당의 한 정파.
연원

사림파(士林派)는 네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명종(明宗) 후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죽음을 계기로 훈척(勳戚)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선조(宣祖)의 즉위 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하여 정국의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부상했던 사림파는 국가의 개혁 방안을 둘러싸고 온건 세력과 개혁 세력이 대립하는 가운데, 1575년(선조 7) 동인(東人)서인(西人)으로 분열하였다.

동인은 퇴계학파(退溪學派), 남명학파(南溟學派), 화담학파(花潭學派) 등 16세기 중반을 풍미했던 세 개의 학파 소속 관료들을 중심으로, 경상도 출신이 많았던 반면, 훈척 세력과의 관계가 다소 긴밀했던 서인은 서울과 경기도 출신이 많았다.

분당(分黨) 이후 임진왜란의 종식에 이르는 20여 년 동안 정국은 동인이 주도하고, 서인이 이들의 독주에 반발하는 형국이었다.

동인 가운데는 온건적 개혁을 펼쳤던 노수신(盧守愼),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범(凡) 퇴계학파가 주류 정치 세력이었고, 급진적인 개혁론을 주창했던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계열의 관료들은 비주류 세력이었다.

동인 가운데 급진론자이자 비주류였던 이들은 개혁이 지지부진했던 이유가 서인의 조직적인 반대와 저항 탓이라고 인식하고, 서인에 대해 강경 입장을 고수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북인의 형성

분당 이후 열세에 놓였던 서인은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를 계기로 보수적 색채가 짙어지는 선조의 지원에 힘입어 정권 탈환에 나섰다.

기축옥사는 ‘ 정여립(鄭汝立) 역모 사건’에 대한 조사 차원에서 이뤄진 옥사였는데, 조사 책임자는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었다. 이 과정에서 1,000여 명에 이르는 동인계 관료나 지식인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비주류인 남명학파 계열의 인사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조식(曺植)의 고제(高弟) 가운데 한 사람인 최영경(崔永慶)이 그런 인물이었다.

집권에 성공한 서인은 선조 이후에도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포석으로 왕세자(王世子) 선임 문제를 거론하였다[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 이 문제의 거론 자체를 기피하던 선조는 1591년 정철, 윤두수(尹斗壽)를 위시한 서인을 내치고 다시 동인을 불러들였다.

3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동인은 서인 처리 문제를 두고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었는데, 온건파는 유성룡, 우성전(禹性傳)을 비롯한 범퇴계학파 계열의 관료들이었고, 강경파는 이산해, 홍여순(洪汝諄) 등을 중심으로 한 화담학파 계열의 관료들이었다.

양대 세력이 긴장이 고조되면서 온건 세력은 남인(南人)으로, 강경 세력은 북인(北人)으로 각각 불려지게 되었다.

남인과 북인의 본격적인 정치 투쟁은 임진왜란 시기에 벌어졌다.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한 남명학파 출신 관료나 지식인들은 의병(義兵)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기축옥사 이후 몰락했던 남명학파가 부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들은 일본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主戰論)을 내세우면서 일본과의 종전 협상을 벌이던 남인을 주화파(主和派)라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 과정에서 퇴계학파의 한 축이었지만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조목(趙穆) 계열의 관료, 학자들도 북인에 가세하는 등, 북인의 몸집은 한층 커졌다. 결국 이들은 1598년 유성룡을 탄핵하여 정계에서 축출시킴으로써 독자적인 정파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변천 및 결과

임진왜란 종료 이후 북인은 명실상부한 집권 세력이 되었다. 이 무렵 이들은 홍여순(洪汝諄)남이공(南以恭)이 서로 대립한 것을 계기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다시 나뉘었다.

북인 가운데서는 정인홍, 이산해(李山海), 홍여순, 이이첨(李爾瞻) 등을 영수로 하는 대북이 가장 강하였다.

그렇지만 1600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사후 선조가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를 왕후로 맞아들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으면서,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대북과 소북 사이에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왕세자 광해군(光海君)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선조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로 인해 유영경(柳永慶), 유희분(柳希奮)을 비롯한 소북이 선조가 사망할 때까지 10여 년간 정계를 이끌었다.

1608년 광해군이 제15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래 줄곧 광해군의 우군을 자처했던 정인홍, 이이첨 등이 정계 실세로 등장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남명학파와 화담학파가 서로 제휴하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과 주전론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북인은 남인과 서인에 비해서는 여전히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열세였다.

남인은 분당 이래 임진왜란 종식 때까지 20여 년 동안 집권 세력으로 정국을 이끌었고, 서인은 왕실과의 유대를 통해 강력한 정파로 존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북인은 정치적 · 사회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1611년 성리학의 정통이 이언적(李彦迪) · 이황(李滉)이 아니라 조식에게 있다는 회퇴변척론(晦退辨斥論), 1614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幽閉) 등과 같은 각종 무리수를 두었다.

이로 인해 북인은 많은 지식인과 관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대북의 전횡과 패륜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일군의 북인이 대오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중북(中北)이라 부르는 데, 기자헌(奇自獻), 유몽인(柳夢寅), 정온(鄭蘊)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광해군 대 주도 정파였던 대북과 범 북인은 1623년 서인들이 주도했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반정 이후 폐정(弊政)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북의 영수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사형을 당했고, 북인은 세상과 인륜을 저버린 정파로 낙인 찍혀 독자적인 정파로 존속할 수 없었다.

이후 북인 잔존 세력들은 활로 모색을 위해 남인으로 전향하거나, 일부는 서인으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독자 정파로서의 북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참고문헌

단행본

신병주,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일지사, 2000)

논문

김성우, 「광해군 대 정치 지형의 변동과 경상도 예안 사족들의 대응」(『역사학보』, 2015)
김성우, 「선조 대 사림파의 정국 장악과 개혁노선의 충돌」(『한국사연구』 132, 2006)
신명호, 「선조 말 · 광해군 초의 정국과 외척」(『청계사학』 10, 1993)
정만조, 「조선시대 붕당론의 전개와 그 성격」(『조선 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관련 미디어 (2)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