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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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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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朋黨)의 한 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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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붕당(朋黨)의 한 정파.
연원 및 변천

선조 초에 당시 문명(文名)이 높았던 선비 김효원(金孝元)과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로 권세가였던 심의겸(沈義謙) 간의 대립이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신진사류들은 김효원을, 기성사류들은 심의겸을 각각 지지했는데 이로써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김효원과 심의겸 두 사람의 대립은 인사권의 요직인 전랑직(銓郎職)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즉, 장원급제로 문명이 높은 김효원이 오건(吳健)과 당시 홍문관직제학 김계휘(金繼輝)에 의해 전랑직에 천거되었다.

심의겸은 그가 일찍이 중종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자 영의정을 지낸 윤원형(尹元衡)의 식객 노릇을 한 것을 지목, 권세에 아부한 선비라며 반대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 전랑에 취임했던 김효원이 그 자리를 떠나 경흥부사로 나가게 되자 심의겸의 아우인 충겸(忠謙)이 후임에 천거되었다. 이번에는 김효원이 왕의 외척에게 전랑의 직책을 맡길 수 없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전랑직을 둘러싸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불화하자 관리와 사림들 사이에도 김효원을 지지하는 파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파로 양분되었다.

당시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낙산(駱山)건천동(乾川洞)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일파를 동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동(貞洞)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일파를 서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인의 영수인 김효원은 주리철학적도학(主理哲學的道學)을 존중하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쌍벽, 즉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에게 배웠다. 따라서 동인의 사상적인 배경과 학통(學統)은 주리철학적 도학에 근거해 있었으며, 학통 또한 영남학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동인에 속한 주도적인 인물들도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황과 조식의 제자들이었다.

동서로 분당된 뒤, 당시 대사헌으로 있었던 이이(李珥)는 정쟁(政爭)의 발발을 미리 막기 위해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외직으로 보내도록 하는 소를 올렸다.

이에 좌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주청으로 김효원은 경흥부사(慶興府使), 심의겸은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부임하였다. 이 인사 조처는 김효원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김효원을 추종하던 인사들은 더욱 불만이 커졌다.

이 결과 조정의 처분이 문제가 되어 김효원·심의겸의 시비는 조신(朝臣)에 공공연한 논란이 되었고 이로써 각각의 지지비판 세력의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이의 분쟁 조정이 오히려 동서인명목(東西人名目)의 성립을 가져오게 한 셈이다.

그 뒤에도 이이는 동·서 사류의 화의를 위해 노력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정쟁은 더 치열해갔다. 1580년(선조 13) 낙향했던 심의겸이 예조참판에 제수되자, 당시 장령인 정인홍(鄭仁弘)이 그를 탄핵했으나 이이의 상소로 무사하게 되었다.

그 뒤 1584년 조정 역할을 했던 이이가 세상을 떠나자 사정은 급변하였다. 즉,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 등이 동인과 합세, 심의겸을 공박하고 나오자 서인 중에서 탈락자가 생기고 심의겸도 파직되어 점점 동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동인은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한때 정권을 서인에게 물려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1591년에 서인의 거두 정철(鄭澈)이 세자책봉 문제로 실각되자 이를 계기로 다시 정권을 잡고 반대당에 대한 유혈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 때 서인 정철의 치죄 문제로 동인 내에서 의견 대립이 생겨 사형을 시키자는 과격파와 귀양을 보내자는 온건파로 대립, 분열하게 되었다. 전자를 북인(北人), 후자를 남인(南人)이라고 한다. 이것이 동인 최초의 분당이었다.

그러나 남북으로 분당되기 전까지는 동인이 세력을 잡았다. 동서분당 이후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되기 전까지 16년 간은 동인 지배의 시대였다. →서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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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西分黨に於ける先輩後輩の對立について」(大谷森繁, 『朝鮮學報』 14, 1959)
집필자
홍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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