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사신(士信). 홍준(洪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소종(洪紹宗)이고, 아버지는 홍은(洪誾)이며, 어머니는 홍윤현(洪胤玄)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고, 1575년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선조를 호종, 북으로 피란 도중에 호조판서로 전임되었다. 평양에 이르러 난민들의 폭동으로 뼈가 부러지는 상처를 당하기도 하였다.
지중추부사로 북도순찰사(北道巡察使)를 겸하였으나, 성품이 간악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순천부에 유배되었다. 난이 끝난 뒤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과 함께 유성룡(柳成龍) 등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1599년 그의 대사헌 임명을 남이공이 반대하자 북인에서 다시 분당하여 대북이라 부르고, 이이첨(李爾瞻) 등과 함께 남이공 등의 소북과 당쟁을 벌이다가 1600년 병조판서에서 삭탈관직되었다.
이듬해 곧 복관되었으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또다시 탄핵을 받아 진도에 유배되어 이듬해 배소에서 죽었다.
유영경(柳永慶)·정인홍(鄭仁弘) 등과 더불어 조정의 현신(賢臣)들을 공박하다가, 이원익(李元翼)에게 이 사람을 쓰다가는 국가에 큰 화가 미치겠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