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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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해 권세를 누렸으며, 영창대군 서인 강등과 사사, 인목대비 유폐 등에 앞장서 대북의 세력 강화를 꾀하다 인조반정 이후에 처형된 문신.
이칭
득여(得輿)
관송(觀松), 쌍리(雙里)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0년(명종 15)
사망 연도
1623년(인조 1)
본관
광주(廣州)
주요 관직
이조정랑|예조판서
관련 사건
광해군 즉위|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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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이이첨은 조선시대 이조정랑,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60년(명종 15)에 태어나 1623년(인조 1)에 사망했다. 선조 말년에 후사문제로 대북·소북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 정인홍과 함께 광해군 옹립을 주장하다가 갑산에 유배당했다. 선조가 갑작스레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겸임하며 권세를 장악했다. 대북세력을 강화하며 소북 일파 숙청, 영창대군 서인 강등과 사사, 인목대비 유폐 등 패악을 저질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을 넘다 관군에게 잡혀 참형되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해 권세를 누렸으며, 영창대군 서인 강등과 사사, 인목대비 유폐 등에 앞장서 대북의 세력 강화를 꾀하다 인조반정 이후에 처형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 좌찬성 이극돈(李克墩)의 후손이며, 이수훈(李秀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범(李範)이다. 아버지는 이우선(李友善)이며, 어머니는 유유일(柳惟一)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3년(선조 27)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냈다. 이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해 거상(居喪)을 극진히 해 효자의 정문이 세워졌다.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典籍)에 승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하였다. 1599년 이조정랑이 되고, 1608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다.

이 때 선조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 · 소북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면서, 당시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을 논박하였다.

이로 인해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에 유배당했다가, 이 해 2월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일약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졌다.

권세를 장악한 이이첨은 정인홍과 함께 심복을 끌어들여 대북의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임해군 이진(臨海君 李珒)과 유영경을 사사되게 하는 등 소북 일파를 숙청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일으켜 선조의 손자 진릉군 이태경(晋陵君 李泰慶) 등을 죽였다.

이듬해 강도죄로 잡힌 박응서(朴應犀) 등을 사주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무고하게 하여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떨어뜨려 강화에 안치시키고 김제남(金悌男) 등을 사사시켰다. 이듬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발의해 이듬 해 대비를 서궁(西宮: 경운궁. 곧 지금의 덕수궁)에 유폐하는 등 생살치폐(生殺置廢)를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영남 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을 넘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되었다. 아들 이원엽(李元燁) · 이홍엽(李弘燁) · 이대엽(李大燁) 삼형제도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야집요(朝野輯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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