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년(광해군 9)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 김대비(金大妃)의 폐출을 위하여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이 폐모계획을 강행할 때, 이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 뒤 1622년 순천부사로 있을 때는 장수현감 이정신(李鼎臣) 등의 탄원에 의하여 구경록사건(仇景祿事件)에 연루되었다.
그 이유는 종을 시켜 무명 20필과 은 50냥을 주어 옥에 갇힌 구경록을 빼어냈다는 죄목이었는데, 이이첨의 모략에 의한 것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정인홍·원수진(元守眞)·한희길(韓希吉) 등과 함께 정형(正刑)에 처하여졌으며, 아들 이영식(李英植)도 폐모론에 적극 가담한 죄로 거제도에 정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