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경은 조선시대 호조참의,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1550년(명종 5)에 태어나 1608년(광해군 즉위)에 사망했다. 임진왜란이 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왜적의 목을 베는 공을 세워 호조참의에 올랐으나 정유재란 때는 가족을 먼저 피란시킨 혐의로 파직되었다. 동인-북인-소북-탁소북의 붕당 이력을 가진 인물로 소북의 영수였다. 장기간 권좌에 있었던 탓에 뇌물 공여가 횡행했고, 선조 말년에는 왕의 뜻을 따라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 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 이이첨·정인홍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1572년(선조 5)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보였고, 1593년 황해도순찰사가 되어 해주에서 왜적을 맞아 60여급을 베는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행재소(行在所)에서 호조참의에 올랐다. 1594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가족을 먼저 피란시켰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병조참판에 서용되었다. 당론이 일어날 때에는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동인에 속했으며, 동인이 다시 남인 · 북인으로 갈라지자 이발(李潑)과 함께 북인에 가담하였다.
1599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남이공(南以恭) · 김신국(金藎國) 등이 같은 북인인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면서 대북 · 소북으로 갈리자, 유희분(柳希奮) 등과 함께 남이공의 당이 되어 영수가 되었다. 이 때 대북파에 밀려 파직되었다가 1602년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그런데 대북파의 기자헌(奇自獻) · 정인홍(鄭仁弘) 등과 심한 마찰을 빚었고 뒤이어 세자 문제로 더욱 분란을 일으켰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진 뒤 선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윤승훈(尹承勳)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1606년 선조 즉위 40주년 행사를 앞당겨 하례(賀禮)하고 증광시(增廣試)까지 실시해, 즉위 때와 같이 경축하게 하는 등 왕의 총애를 굳히려 하였다. 오랫동안 집권해 권력이 증대되고 뇌물 공여도 횡행하였다. 그 뒤 같은 소북파인 남이공과 불화해 탁소북(濁小北)으로 분파했으며, 선조 말년에 왕의 뜻을 따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광해군 대신 옹립하려 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기 전에 영창대군을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 이이첨(李爾瞻) · 정인홍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유생의 명단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