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북산(北山). 이달선(李達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공인(李公仁)이다. 아버지는 제학 이중호(李仲虎)이며, 어머니는 윤구(尹衢)의 딸이다. 김근공(金謹恭)·민순(閔純)의 문인이다.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장원,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었다. 1579년 응교, 1581년 전한, 1583년 부제학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홍가신(洪可臣)·허당(許鐺)·박의(朴宜)·윤기신(尹起莘)·김영일(金榮一)·김우옹(金宇顒)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최영경(崔永慶)과 가장 친하였다.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아 사론(士論)을 주도,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왕도정치를 제창하여 기강을 학립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렸다.
또, 이조전랑으로 있을 때에는 자파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파를 영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
1589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남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待罪)하던 중 잡혀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杖殺)되었다.
이발이 죽은 뒤 82세의 노모와 8세의 아들도 엄형(嚴刑)으로 죽었는데, 노모는 형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꾸짖으면서 끝내 역모에 관한 일을 승복하지 않았으며, 문생·노비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는 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