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충주(忠州). 할아버지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박우(朴祐)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박순(朴淳)이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학문이 깊은 쟁쟁한 문사였으나 서출(庶出)이어서 출세길이 막혀 있었다.
서얼차대(庶孽差待)에 불만을 품고 같은 명문의 서자들인 김평손(金平孫)·심우영(沈友英)·서양갑(徐羊甲)·박치의(朴致毅)·박치인(朴致仁)·이경준(李耕俊) 등과 강변칠우(江邊七友) 또는 죽림칠우(竹林七友)라 자처하며, 여주의 북한강 근처에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정자(亭子)의 이름을 무륜당(無倫堂)이라 하였다. 또 이재영(李再榮)·허균(許筠) 등과도 사귀었다.
광해군 즉위 초에 이들이 연명상소(連名上疏: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실음)해 서얼허통(庶孽許通: 서얼 출신들의 관계 진출을 허용하는 제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6,700냥을 약탈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일당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자신의 화를 모면시켜 주겠다는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등의 유혹에 넘어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강탈했다고 거짓 자백하였다.
이 때문에 영창대군은 강화에 유배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이며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은 사형, 기타 소북파(小北派)들은 숙청당하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칠서일당(七庶一黨)이 모두 연루되어 죄가 다스려졌으나 혼자만 용서되어 석방되었다. 이들의 활약이 「홍길동전」의 주제가 되었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잡혀 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