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지정(持正). 조공립(趙恭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흠(趙嶔)이고, 아버지는 조이건(趙以乾)이며, 어머니는 남두화(南斗華)의 딸이다.
1686년(숙종 12) 춘당대 문과에 장원하여 바로 정6품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으나, 고묘론(告廟論)에 대한 상소 주도로 대사간 정재희(鄭載禧)의 탄핵을 받아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삭제당하였다. 그 뒤 1689년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이광한(李光漢)·김익훈(金益勳) 등 노론계의 훈적(勳籍: 공훈의 내용을 기록한 명단) 삭제를 주창했고, 이어 정언(正言)에 제수되어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하였으며, 남구만(南九萬)을 중도부처(中道付處)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어 차사(箚辭)가 과격하여 귀양가게 된 이상진(李尙眞)을 구하기 위한 소(疏)로 체직(遞職)된 뒤 복직되었다가 지평으로 제수되었고, 1690년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부교리(副校理)에 제수된 뒤 다시 사헌부지평으로 옮겼고, 이듬해에는 부교리로 재직 중 전라도를 비밀리에 염찰(廉察)하고 돌아와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었다. 1692년 공조참의를 거쳐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694년 수원부사(水原府使) 재직 중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있자 장령(掌令) 유집일(兪集一) 등의 탄핵을 받았고, 이어 대관(臺官)으로 재직시 노론 대신 송시열(宋時烈)·민정중(閔鼎重)의 안률(按律: 죄안을 고찰함)을 먼저 발의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갔다가 1697년 석방되었다. 1702년 65세의 노구로 종성부사(鍾城府使)를 그만둔 뒤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