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고대 사회 이래 피지배층, 곧 평민(平民)들은 ‘사 · 농 · 공 · 상(士農工商)’이라는 네 가지의 범주 안에서 직업을 수행한다는 사민관(四民觀)을 갖고 있었다. 사민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관중(管仲, ?서기전 645)의 『관자(管子)』, 좌구명(左丘明)의 『국어(國語)』 등 춘추시대(春秋時代, 서기전 770서기전 403) 후기의 저작들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런 점에 비춰볼 때 사민과 ‘사민 분업(分業)’에 대한 인식은 춘추시대 후기에 유가적(儒家的) 지식인들에 의해 정형화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역사에서 사 · 농 · 공 · 상이 서로 동등하다고 인식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고대 이래 중국 사회에서는 관인층, 곧 관료가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사인은 관료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연마한다는 점에서, 관인층보다는 지위가 낮았지만 평민층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다음 순위는 농민, 그리고 공인, 상인 순이었다. 공인과 상인을 농민 아래 둔 까닭은 전근대 역대 중국 왕조의 주요 정책 기조인 ‘숭농억상(崇農抑商) 정책’과 관련이 있다.
농업 경제를 위주로 사회를 운영해 나간 중국은 중농주의(重農主義)에 기초한 경제 구조와 사회 체제를 방해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공업과 상업의 발전을 경계하고 억압하였다. 중국 역대 왕조가 사(士)와 농(農) 계층에게 우호적이었던 반면, 공 · 상(工商) 계층에게는 차별적인 조처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사민이 국가 유지의 근간이 되는 공민(公民)이라는 점에서 서인(庶人)이나 양인(良人)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용어들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다. 서주(西周) 시대(서기전 1046~서기전 771) 이래 중국 정부가 공민을 지칭하는 법률상 용어는 평민(平民) 혹은 서인(庶人)이었다.
정부가 공민을 양인(良人)으로 부른 것은 양천제(良賤制)가 확립된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471~499) 이후였다. 수당(隋唐) 시대를 거치면서 율령체제(律令體制)가 확립됨에 따라 전체 인민을 양천으로 구분하여 편제하는 양천제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후 중국 역사에서 공민은 양인이라는 명칭으로 더 널리 사용되었고, 공민 자격이 부여되지 않은 사민(私民)은 천인(賤人)으로 불렸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전체 인민을 사 · 농 · 공 · 상이라는 네 가지의 직업군으로 구분하였고, 그러한 관념 아래 전체 인민을 편제하는 전통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당(唐)나라에서 확립된 율령체제가 본격적으로 수용됨에 따라, 양천제가 공식적인 인민 편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정부는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공민층을 양인으로, 국역을 부담할 수 없는 자들, 곧 사민층(私民層)은 천인(賤人)으로 구분하였다. 이후 사 · 농 · 공 · 상 4개의 직업군으로 분류된 공민들은 국역체제(國役體制) 운영의 근간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사민 가운데 사인과 농민을 중시한 반면, 중농주의를 훼손할 수 있는 공인과 상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사회적 · 제도적 차별 장치를 마련해 갔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인은 사인과 농민이 중심이 되었고, 공인과 상인은 “신분은 양인이되 직업은 천하다.”는 이유로 ‘신량역천층(身良役賤層)’으로 분류되어 공민으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이들은 교육, 지역 사회 참여, 관직 수행과 같은 공민들의 보편적인 권리를 향유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