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 제20대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동원상하릉.
이칭
속칭
경종릉
이칭
서울 의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동원상하릉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경종|선의왕후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20 (석관동, 문화재청의릉지구관리소)
내용 요약

의릉(懿陵)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 제20대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동원상하릉이다. 1724년에 경종의 능침을 조성하고, 1730년에 경종과 같은 언덕에 약 80자 정도 아래에 선의왕후의 능침을 마련하여 상하로 배치된 두 개의 봉분이 완성되었다. 1962년에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가 의릉 경내에 자리 잡으면서 의릉의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정원으로 활용하였으나, 1995년 중앙정보부가 이전하고 능역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정의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 제20대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동원상하릉.
건립경위

1724년 8월 25일에 경종(景宗, 1688~1724, 재위 1720~1724)이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였다. 산릉 터를 자세히 살핀 결과, 옛 영릉(寧陵) 자리와 양주 중량포가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영조는 옛 영릉의 터는 건원릉(健元陵) 내에 있으며 산세도 좋으나, 천릉하고 옮겨 간 옛터에 새 능을 조성한 사례가 없으므로 중량포를 선택하였다. 9월 24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12월 16일에 국장 의례를 마치고 12월 24일에 완공되었다.

1730년(영조 6) 6월 29일에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1730)가 경희궁의 어조당에서 승하하였다. 선의왕후는 1724년에 의릉을 조성할 당시, 같은 능역의 동쪽에 산릉을 조성할 곳을 예정하고 경종 곁에 묻히려는 의지를 나타내었다. 그 뜻에 따라 의릉 주변을 자시히 살펴 경종의 능침이 조성된 지점에서 약 80자 정도 아래에 선의왕후의 능침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공역은 8월 6일에 시작되었으며, 10월 19일에 국장 의례를 행하였다. 이로써 의릉에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침이 하나의 언덕에 상하로 배치되는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으로 완성되었다.

변천

1730년에 선의왕후의 능침을 마련하고 상례를 거행하기 위하여 가정자각(假丁字閣)을 5칸 규모로 건립하였다. 경종의 산릉에 왕후를 합부한 것이니, 광릉(光陵)의 전례를 따라 가정자각을 지어 상례를 마치고 철거하여, 본래 주1에서 제례를 합하여 지내도록 하였다.

1962년에는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가 의릉 경내에 들어서면서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고 청사를 세웠다. 1970년 5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1972년 정자각 앞에 인공 연못을 만들어 정원으로 사용하였다. 1973년에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의 영원(英園)을 조성하면서 주2을 옮겨가는 등 훼손이 일어났다. 1995년에 중앙정보부가 이전하면서 능역을 점차 복원하였다.

형태와 특징

의릉은 양주 주3의 남쪽에 주4으로 자리잡았다. 산릉의 제도는 명릉(明陵)의 전례를 따라 봉릉에는 주5을 갖추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 둘렀으며, 정자각은 8칸 규모에 주6으로 건립하였다.

능상의 주7주8혜릉(惠陵)의 돌거리를 참고하여 조각하였다. 특히 무석인의 갑옷은 허리띠 아래로 꼬리가 둥글게 말린 표범가죽을 걸친 모습으로 조각되었는데, 이것은 혜릉과 의릉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다.

의의 및 평가

동원상하릉은 여주의 영릉과 의릉에서만 보이는 특별한 배치이다. 1673년에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의 영릉을 여주로 주9하고 1674년에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의 능을 조성할 때, 대왕릉과 같은 언덕에 상하로 배치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있었다.

당시 풍수적인 논란이 있었으나 왕릉을 위쪽에 두고 아래에 왕후릉을 배치하여 위계에 따라 배치하고, 왕후릉에 주10을 생략하여 막힘이 없도록 조성하였다. 영릉의 전례를 따라 의릉도 경종의 능침 아래에 선의왕후의 능침을 마련하여 동원상하릉으로 조성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경종(景宗)〕의릉산릉도감의궤([景宗]懿陵山陵都監儀軌)』
『〔선의왕후(宣懿王后)〕의릉산릉도감의궤([宣懿王后]懿陵山陵都監儀軌)』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Ⅵ』(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서울의 능묘』(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의릉 능제복원 기본 및 실시설계』(문화재청, 2008)
주석
주1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2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우리말샘

주3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우리말샘

주4

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가 신방(申方)을 등지고 인방(寅方)을 바라보고 앉은 자리.    우리말샘

주5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6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우리말샘

주7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8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9

산릉을 옮겨 모심.    우리말샘

주10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신지혜(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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