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4년 8월 25일에 경종(景宗, 16881724, 재위 17201724)이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였다. 산릉 터를 자세히 살핀 결과, 옛 영릉(寧陵) 자리와 양주 중량포가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영조는 옛 영릉의 터는 건원릉(健元陵) 내에 있으며 산세도 좋으나, 천릉하고 옮겨 간 옛터에 새 능을 조성한 사례가 없으므로 중량포를 선택하였다. 9월 24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12월 16일에 국장 의례를 마치고 12월 24일에 완공되었다.
1730년(영조 6) 6월 29일에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1730)가 경희궁의 어조당에서 승하하였다. 선의왕후는 1724년에 의릉을 조성할 당시, 같은 능역의 동쪽에 산릉을 조성할 곳을 예정하고 경종 곁에 묻히려는 의지를 나타내었다. 그 뜻에 따라 의릉 주변을 자시히 살펴 경종의 능침이 조성된 지점에서 약 80자 정도 아래에 선의왕후의 능침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공역은 8월 6일에 시작되었으며, 10월 19일에 국장 의례를 행하였다. 이로써 의릉에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침이 하나의 언덕에 상하로 배치되는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으로 완성되었다.
1730년에 선의왕후의 능침을 마련하고 상례를 거행하기 위하여 가정자각(假丁字閣)을 5칸 규모로 건립하였다. 경종의 산릉에 왕후를 합부한 것이니, 광릉(光陵)의 전례를 따라 가정자각을 지어 상례를 마치고 철거하여, 본래 정자각(丁字閣)에서 제례를 합하여 지내도록 하였다.
1962년에는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가 의릉 경내에 들어서면서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고 청사를 세웠다. 1970년 5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1972년 정자각 앞에 인공 연못을 만들어 정원으로 사용하였다. 1973년에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의 영원(英園)을 조성하면서 재실(齋室)을 옮겨가는 등 훼손이 일어났다. 1995년에 중앙정보부가 이전하면서 능역을 점차 복원하였다.
동원상하릉은 여주의 영릉과 의릉에서만 보이는 특별한 배치이다. 1673년에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의 영릉을 여주로 천릉하고 1674년에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의 능을 조성할 때, 대왕릉과 같은 언덕에 상하로 배치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있었다.
당시 풍수적인 논란이 있었으나 왕릉을 위쪽에 두고 아래에 왕후릉을 배치하여 위계에 따라 배치하고, 왕후릉에 곡담을 생략하여 막힘이 없도록 조성하였다. 영릉의 전례를 따라 의릉도 경종의 능침 아래에 선의왕후의 능침을 마련하여 동원상하릉으로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