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비 명성왕후를 모신 무덤으로 동구릉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이며, 능 아래에 정자각과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숭릉 정자각은 1674년(숙종 즉위년)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면서 같이 건립하였다.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한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규모는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전체 8칸이다.
숭릉 정자각은 1674년(숙종 즉위년)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며 같이 건립하였다. 건립 이후 정자각은 몇 차례 수리가 있었다. 1828년(순조 28)에는 정자각 월대를 개축하였으며, 1879년(고종16)에는 첨계석을 수리하였다. 1899년(고종36)에 배위청 기둥이 기울어 보수하였고, 1997년에 해체 보수하였다.
숭릉 정자각은 정전 5칸, 배위청 3칸으로 전체 8칸 규모이며,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정전은 5칸 중 가운데 3칸은 좌우에 전돌로 화방벽을 쌓고 양 끝 한칸 즉 익각(翼閣)은 기둥만 세우고 개방하였다. 그 전면 중앙에 정면 1칸, 측면 3칸의 배위청이 이어져 모두 8칸 정자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정자각은 정전 3칸, 배위청 2칸의 5칸 정자각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으나 숭릉 정자각은 규모가 확대된 8칸 건물이다. 『숭릉산릉도감의궤』계사, 9월 16일조에는 “총호사가 아뢰기를, ‘각능 정자각은 모두 정각(正閣) 3칸, 전면(前面) 2칸으로 조성되어 합쳐서 5칸인데 유독 광릉 정자각은 정각 3칸의 밖에 또 좌우 익각이 있고 전면에도 1칸을 추가하여 합쳐서 8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년에 영릉(寧陵) 정자각에 대해 전교하시기를 광릉의 제도를 모방하여 8칸으로 조성하라고 하시었습니다. 이제 이 정자각은 각릉의 제도를 따를 것인지 영릉의 제도를 따를지 여부를 감히 품하여 아룁니다’하니 왕이 답하여 ‘한결같이 영릉의 제도를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러므로 지금의 숭릉 정자각의 모습은 바로 광릉의 제도를 따른 영릉을 본받은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지붕이 팔작지붕인 것도 영릉의 형태를 따른 것으로 보여지나 영릉 정자각이 고종 연간에 일반적인 모습의 5칸 정자각으로 개조되었기 때문에 지금으로써는 그 유래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숭릉산릉도감의궤』에 기록된 소요자재를 보면 ‘선자연(扇椽) 156개’, ‘사래(舍羅)’ 등 팔작지붕과 관련된 부재들이 언급되어 있어 숭릉 정자각은 창건시부터 팔작지붕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공포는 정전은 일출목 이익공, 배위청은 이익공의 구조이다. 정자각은 규모가 8칸으로 확대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외관을 하고 있다.
숭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한 팔작지붕을 한 정자각이며 규모가 8칸이다. 8칸 정자각은 광릉 이후에 기록상으로 선릉, 정릉, 효릉, 강릉, 장릉 등에서 꾸준히 나타나고 있으며 현존하는 것으로는 숭릉 외에도 익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이 있다. 그러나 이들 정자각은 지붕이 모두 맞배지붕이며 숭릉 정자각만이 팔작지붕 을 하고 있다.
정자각은 정전 3칸, 배위청 2칸의 5칸 정자각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숭릉 정자각은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8칸 정자각이며 유일하게 지붕이 팔작지붕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광릉의 제도를 따른 영릉을 본받은 결과이다. 1674년 창건시의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건물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