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전등사 대웅전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중건된 사찰 건물이다. 전등사는 강화도의 남쪽 정족산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이색의 기록을 보면 고려 후기 정화궁주의 원찰(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절)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산성과 사고를 수호하는 임무를 지닌 중요한 사찰이었다. 전등사의 대웅전은 1621년에 다시 세워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공포 상부의 용머리 조각, 추녀 하부의 사람 모양의 조각상이 특이점이다. 이 건물은 건축사와 미술사적인 가치가 높은 국가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등사는 강화도의 남쪽 끝 정족산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정족산의 세 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삼랑성(三郞城, 일명 정족산성)이 있는데, 이 성은 단군이 세 아들에게 나누어 쌓게 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전등사는 창건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후기 정화궁주(충렬왕의 원비)의 원찰(願刹)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산성과 사고(史庫)를 수호하는 임무를 지닌 중요한 사찰이었다. 대웅전은 전등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삼존불(釋迦如來三尊佛)을 모시고 있다.
전등사는 「전등사본말사지(傳燈寺本末寺誌)」(1942년)에 고구려 381년(소수림왕 1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본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아도화상의 행적과 진종사가 북한 풍덕군에 있는 고흥 유씨의 원찰이었음을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고려사(高麗史)』에는 1259년(고종 46) 삼랑성 동쪽에 임시로 궁궐을 짓고 1264년(원종 5) 이곳에서 불교 법회[佛頂道場]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는 초기부터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 궁궐 안팎에 여러 사찰을 세워 운영하였다. 그러므로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고에 대항하던 이 시기에 전등사가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정화궁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시켜 송(宋)의 대장경을 가져와 전등사에 보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색(李穡)이 1389년부터 1391년 사이에 강화도를 여행하면서 쓴 시에 전등사가 정화궁주의 원찰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 전기까지 전등사의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 문소전(文昭殿)에 있었던 조선 왕실의 위패(位牌)와 영정이 전등사에 임시로 봉안되면서 전등사는 나라의 관심을 받는 사찰로 바뀌었다. 그러나 1605년(선조 38)과 1614년(광해군 6) 2번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1615년부터 6년 동안 중건공사를 통해 전등사는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1660년(현종 원년)에는 왕실의 유물과 실록 등을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과 사고를 정족산성 안으로 옮겨 지으면서 전등사는 이를 보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갖게 되었다.
전등사 대웅전은 1621년(광해군 13)에 다시 세워진 건물이다. 1839년(헌종 5), 1855년(철종 6), 1876년(고종 13)에 중수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가 이루어졌으나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전등사는 대웅전 영역을 중심으로 좌우에 여러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대웅전 영역은 본래 가운에 중정을 두고 남북으로 대조루와 대웅전이 마주하고 동서로 ‘ㅁ’자형의 요사가 있는 4동중정형(四棟中庭形) 배치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2년 적묵당과 강설당을 옮기면서 중정의 느낌이 사라져 버리고 주변에 여러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배치를 갖게 되었다.
대웅전은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배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외2출목, 내4출목 형식이다. 첨차는 하부를 둥글게 깎아 낸 교두형(翹頭刑) 첨차를 사용하였다. 초제공과 2제공 살미(山彌)는 앙서형(仰舌形)이나, 3제공은 수서형(垂舌形)으로 익공(翼工)의 모습을 하고 있다. 4운공(雲工)은 당초문(唐草紋)을 초각하였는데 주상포(柱上包 : 기둥 위에 짠 공포)에서는 용머리로 장식하였다. 제공은 불전 내부에서 일체형으로 조각하여 장식성을 높였다.
가구 구조는 내부에 기둥이 없는 5량 구조이다. 도리는 단면이 원형인데 내목도리는 특이하게 반원형의 도리를 사용하였다. 앞뒤 기둥 상부의 4제공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낮은 포대공을 놓아 종보를 받쳤으며, 종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받쳤다. 충량은 자연스럽게 휜 부재를 사용하였는데 대들보 위에 걸치는 부분은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 겹처마이다. 천장은 내목도리를 경계로 안쪽은 우물반자를 설치하되 층을 나누었으며 바깥쪽은 빗천장으로 처리하였다. 불상은 조각이 화려한 불단(수미단) 위에 모셨으며 그 위에는 정(丁)자 모양의 닫집(唐家)을 설치하여 장엄하였다. 건물 내부는 용과 극락조, 물고기 등의 조각물로 장식하고 단청을 화려하게 꾸몄다.
전등사 대웅전은 정면과 측면의 비가 1:0.9로서 정면에 비해 측면을 다소 크게 설정한 평면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공포는 외부보다 내부 출목수가 많으며 측면 공포의 배열수법이 특색 있다. 정면의 경우 매 칸마다 2조의 주간포(기둥 사이에 있는 포)를 배열하였다. 그러나 측면에서는 주간포를 어칸(御間 : 가운데 넓은 칸)에 3조, 협간(夾間 : 어칸의 좌우에 있는 칸)에 1조씩 놓고 공포 간격을 같게 설정하기 위해 주상포를 기둥 중심에서 벗어난 위치에 놓았다. 화려한 조각과 장식도 이 건물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이다. 공포 상부의 용머리 조각과 추녀 하부를 받치고 있는 사람 모양의 조각상은 다른 건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모습이다.
전등사 대웅전은 불전의 장식이 화려해지는 경향과 부재의 능숙한 조각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어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계 불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축사뿐만 아니라 미술사적인 가치가 높은 국가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2년 적묵당과 강설당을 옮김으로서 대웅전 앞에 있는 중정의 공간감이 사라져버린 점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