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阿道)는 아도(我道) 혹은 아두(阿頭)라고도 한다. 아도(阿道)를 아두(阿頭)라고 하면 ‘머리카락이 없는 승려’를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된다. 이렇게 보면 아도는 어느 한 명을 특정할 수 없는 이름이며, 비처왕 때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의 승려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보아야 한다. 반면 아도(我道)라 하면 「아도본비(我道本碑)」의 기술처럼 위(魏)나라 사신이었던 아굴마(我掘摩)와 고구려 여인 고도녕(高道寧) 사이에서 태어난 고구려의 승려로 특정시킬 수 있다.
후자인 아굴마의 아들 아도는 5살 때 어머니에 의해 출가하였으며 16세에는 위나라로 가서 자신의 아버지인 아굴마를 만났다. 아굴마는 아들 아도를 현창(玄彰)화상의 문하로 나아가 불법을 배우게 하였다. 아도는 19살이 되어 어머니가 있는 고구려로 돌아왔다. 고도녕은 그에게 신라로 건너갈 것을 권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나라는 아직 불법을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 삼천여 달이 지나면 계림에 성왕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곳의 서울 안에 절터가 일곱 곳이 있으니, 하나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興輪寺)이요, 둘째는 삼천기(永興寺)이며, 셋째는 용궁 남쪽(皇龍寺)이요, 넷째는 용궁 북쪽(芬皇寺)이며, 다섯째는 사천미(靈妙寺)요, 여섯째는 신유림(四天王寺)이요, 일곱째는 서청전(曇嚴寺)이니 모두 전불(前佛) 때의 절터이다. 법수(法水)가 깊이 흐르는 땅이니 네가 거기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마땅히 그 땅의 불교의 초석이 될 것이다.” 아도는 263년(미추왕 2) 신라로 들어가 불법을 펼치고자 했으나, 모두들 전에 보지 못하였던 것이라 하여 의심하며 심지어는 아도를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아도는 속림(續林)에 있는 모록(毛祿)의 집에 3년을 숨어 있었다. 264년(미추왕 3)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당이나 의원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사방에서 의원을 찾았다. 아도가 급히 대궐로 나아가자 공주의 병이 나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아도에게 소원을 묻자 이렇게 답하였다. “빈도는 원하는 것이 없고, 다만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고 불교를 크게 일으켜 이 나라가 복 받기를 빌고자 합니다.” 이에 왕이 허락하였다. 아도는 띠풀로 지붕을 덮어 흥륜사를 창건한 뒤 그곳에서 설법하였다. 모록의 누이 사씨(史氏)는 아도법사에 귀의하여 신라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그녀는 삼천기(三川岐)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고 하였다. 얼마 후 미추왕이 별세하자 사람들이 법사를 헤치려 하였다. 아도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라의 불교도 끊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아도본비」의 내용만을 놓고 보면 아도는 아굴마와 고도령 사이에서 태어난 고구려 승려로서 신라불교의 초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찬자 일연은 비처왕 때의 아도 일화를 수록한 「신라본기(新羅本記)」와 미추왕 때의 아도 관련 내용을 기술한 「아도본비」의 설이 어긋난다 하며 두 명의 아도를 구분하지 못하였다.
「신라본기」와 「아도본비」에 등장하는 두 명의 아도는 서로 다른 사람임이 분명하다. 또한 고구려 불교의 재전자인 동진에서 온 아도 역시 신라불교의 초전자 아도와는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눌지왕 때 신라에 온 묵호자(墨胡子) 역시 「신라본기」와 「아도본비」의 아도와 같은 인물로 확정할 수 없다. 나아가 백제 불교의 초전자인 마라난타와 아도를 동일 인물로 볼 근거도 없다.
결국 신라 미추왕 때 신라에 건어온 아굴마와 고도령의 아들 아도, 고구려 불교의 재전자 아도, 그리고 비처왕 때의 아도는 분명 다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 불교 초전자인 마라난타와 신라 눌지왕 때의 묵호자의 외형은 비록 머리를 깎은 아두형일 가능성은 있지만, 고구려 불교의 재전자 아도와 비처왕 때의 아도와는 다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