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사 대웅전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선운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중건된 사찰 건물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선운사는 삼국시대 창건한 절로 자연경관이 빼어나다. 절의 이름은 ‘구름 속에서 참선 수도하여 큰 뜻을 깨친다’는 ‘참선와운’에서 유래되었다. 선운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단층 맞배집으로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 정면에 ‘대웅보전’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 중앙에 비로자나불이,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있다. 대웅전 외관은 비교적 화려한 반면 내부는 절제적이며 섬세한 건축수법을 보여준다.
선운사는 577년(백제 위덕왕 24) 백제의 고승 검단(檢旦 또는 黔丹)이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 진흥왕이 의운국사(義雲國師)에게 명하여 창건했다는 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 창건설은 당시 선운사가 위치한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고, 백제와 신라의 외교관계를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선운사는 1318년(충숙왕 5)과 1354년(공민왕 3)에 중수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사(廢寺)되었다. 1472년(성종 3) 행호선사(幸浩禪師)는 탑만 남아 있던 자리에 덕원군(德源君)의 후원을 받아 10여 년 동안 대규모 가람으로 중창하였다.
이때 선운사는 왕실 원당(願堂)의 기능을 갖게 되었으며 천불대광명전 · 관음전 · 금당 · 능인전 · 지장전 · 나한전 · 대장전 · 보현전 · 설법전 · 시왕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과 문, 요사 등의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덕원군별원당선운산선운사중창산세사적형지안(德源君別願堂禪雲山禪雲寺重創山勢事蹟形止案)」(1483년)에는 당시 선운사 건물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종열위영가(祖宗列位靈駕), 시주자 명단, 축원문(祝願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찬란했던 선운사는 정유재란 때 초토화되면서 성종의 선왕 · 선후의 영가를 모신 곳인 성종의 어실(御室)만 남게 되었고 1608년∼1609년 사이에 승려 수십 명이 모여 법당 3칸을 세웠다고 한다.
1614년(광해군 6)에는 무장현감 송석조(宋碩祚)가 재건 불사를 주도하여 법당을 5칸으로 증축하고, 건물의 방향도 지금과 같이 바꾸었다. 이때 증축된 건물이 지금의 선운사 대웅전이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상은 1633년에는 조성을 시작하여 이듬해 봉안된 것이다. 그러나 대웅전은 1839년 장마로 인해 오른쪽 2칸이 붕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이듬해 보수되었다. 1973년에는 부식된 부재를 교체하면서 단청을 다시 칠하고 기와도 교체하였으며 1992년에는 지붕을 수리하였다.
선운사는 계곡을 따라 동서로 긴 평탄한 대지 위에 여러 동의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중심부에는 천왕문과 만세루, 대웅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과 만세루의 서쪽에는 영산전 · 팔상전 · 명부전 등이 자리하며, 동쪽에는 동상실 · 능인각 · 유물전시관 등이 있다.
대웅전은 비교적 높은 석축 위에 야트막한 기단을 놓고 건물을 세웠다. 초석은 자연석인데, 측면 고주(高柱)와 활주를 받치는 초석은 원형의 높은 초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기둥이며 일부는 휘어진 부재를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미가 느껴진다. 평면은 정면이 측면에 비해 2배 이상 되는 긴 장방형이지만 어칸을 협칸보다 3자 이상 길게 하고 기둥 높이도 적당하여 전체적으로 장중한 모습을 보여준다.
창호는 정면 어칸에 4분합문을 설치하고 협칸에는 2짝 빗살문을 달았다. 측면에는 서쪽의 전면 협칸에만 출입문을 냈다. 동선을 고려하여 서쪽에 있는 요사와 연결하기 위한 것이지만 한쪽에만 문이 있어 자연스럽지 못하다.
공포는 내외 3출목 형식이다. 첨차는 하부를 둥글게 깎은 교두형(翹頭形)인데 귀공포에 사용된 첨차와 3출목 첨차 일부만 초각(草刻)이 있다. 초제공은 끝 부분이 하늘을 향해 뻗은 앙서형(仰舌形)이고, 2제공과 3제공은 끝부분이 아래로 뻗은 수서형(垂舌形)이다. 4제공은 익공(翼工)이며 5제공은 운공(雲工)을 사용하였다. 제공은 내부에서 일체형으로 초각되어 보아지 역할을 한다.
가구구조(架構構造)는 고주가 직접 중도리를 받는 1고주 5량 형식이다. 대들보와 툇보는 4제공 위에 놓이고 고주와 결구되어 있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놓고 간단한 포를 짜서 종보를 받쳤으며,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도록 했다.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특이하게 외목도리 하부에 활주를 세워 받쳤다. 천장은 가운데 1칸만 우물천장으로 꾸미고 나머지는 널반자로 간단하게 처리하였는데 중도리와 내목도리 사이에는 빗천장으로 처리하였다. 간결하게 처리한 내부의 모습도 장중한 외형에 못지않게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선운사 대웅전은 정면과 측면의 비율이 약 2:1로 다른 불전에 비해 정면이 측면보다 훨씬 넓다. 정면은 화려하게 꾸민 반면에 배면은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한 조형적 특징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면의 경우 제공을 길게 빼고 처마는 겹처마로 처리하였으나, 배면은 제공 쇠서를 거의 생략하여 교두형으로 처리하고 처마도 홑처마로 구성하였다.
정면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봉안하고 좌우에 협시불을 모신다. 그러나 선운사 대웅전은 중앙에 비로나자불을 모시고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봉안하여 불상과 전각의 명칭이 일치하지 않는다. 18세기 후반까지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대법당이라 불렀던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선운사 대웅전은 1614년(광해군 6)에 중건된 건물로서 조선 중기 이후 다포계 맞배집의 건축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외관은 비교적 화려하게 꾸민 반면에 내부는 장식을 절제하면서도 섬세한 건축수법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