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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복궁 근정전의 귀공포
서울 경복궁 근정전의 귀공포
건축
개념
우리 나라와 중국 · 일본 등지의 전통목조건축에서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부재(部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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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우리 나라와 중국 · 일본 등지의 전통목조건축에서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부재(部材).
내용

일반적으로 궁궐 · 사찰 · 기념적 건축에 쓰이며, 기둥과 보, 기둥과 도리 등의 수직재(垂直材)와 횡재(橫材)가 맞추어질 때 장식적 또는 구조적으로 짜여져서 여러 부재가 결속된 것을 말한다.

이것은 건물 내부에서 낮은 도리와 높은 도리 사이, 또 동자주(童子柱)와 종보[宗梁]와 종도리의 맞춤에도 사용될 수 있고, 대공(臺工)과 종도리 사이에도 짜일 수 있다.

또, 외부로는 창방(昌枋) · 평방(平枋)과 처마도리 사이, 외목도리(外目道里)와 주심도리 사이에도 짜이는 것이 보통이고, 기둥 위 주두(柱枓 : 대접처럼 널찍하고 네모진 나무)에 놓이는 것과 주두 밑에 놓이는 것 등 실로 다양하다.

공포는 건물 지붕의 무게를 분산 혹은 집중시켜 구조적으로 안전한 완충적 기능을 하기도 하고, 내부공간을 확장시키고 건물을 높여 웅장한 멋을 낼 뿐 아니라, 그 구성과 공작이 섬세하고 화려하여 장식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와 중국 · 일본 등지의 전통 목조건축에서 공포는 그 건물의 가장 중요한 의장적 표현(意匠的表現)으로서 각 시대에 따라 특징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특징의 변화는 건물 어느 부분보다도 민감하여 문헌기록이 없는 건축이라도 시대의 추정과 건물의 구조 및 양식 분류를 할 수 있는 중요자료가 됨은 물론이다.

우리 나라 목조건축에 ‘포(包)’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포’라는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647년 발간된 ≪창덕궁수리도감의궤 昌德宮修理都監儀軌≫에서 ‘첨차(檐遮)’ · ‘제공(諸工)’ · ‘입공(立工)’ · ‘엽공(葉工)’ · ‘소로[小累]’ · ‘장여[장혀, 長舌]’ 등 공포를 이루고 있는 부재명이 기록되고 있음을 보아, 그 이전부터 공포에 대한 명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에서 공포의 사용이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4,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발달된 공포구조로 보아 이보다 훨씬 앞서 공포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수혈주거에서 공포의 이용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서까래가 지면에서 떨어져 처마를 이룰 때부터는 기둥과 보 그리고 서까래 사이에는 공포를 이룰 수 있는 부재(副材)가 놓일 수 있다. 이들 부재는 처마를 깊게 내밀 때 또는 보를 보강하는 데 구조적으로 필요하며, 바로 이러한 부재의 조립이 공포 발전의 시작이다.

고구려는 한나라의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에서 제일 먼저 발달된 공포를 사용하였다. 실제로 한나라의 석궐(石闕)이나 명기(明器)에 나타나는 공포의 형태와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공포는 서로 통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사용된 공포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하나의 주두 위에 첨차를 얹고 그 위에 3개의 소로를 놓는 1주두 3소로식의 포작을 꾸미고 있다.

② 주두와 소로에 굽받침이 있고, 주두의 굽은 심한 만곡을 이루었다. ③ 공간포(空間包)로서 ‘∧’모양 또는 동자주형을 쓰기도 하였다.

④ 첨차의 양끝을 수직으로 절단하여 밑을 45°경사로 직절하였거나 거칠게 곡을 만들어 깎고, 첨차 상면은 우묵히 공안(栱眼)을 파지 않고 양단을 소로 굽의 너비만큼 목을 약간 올렸다.

⑤ 주두 위에 첨차가 한 단 놓인 것과 소첨 · 대첨이 겹쳐 2단을 이룬 형식 첨차가 전체적으로 곡을 나타낸 것 등 다양하였다.

백제시대에 사용되었던 공포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단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동소탑편(靑銅小塔片)에서 공포의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기둥 상부에서 밖으로 뻗어나온 첨차 위에 서까래쪽에서 밑으로 경사져 내려온 하앙(下昻)과 같은 부재가 표현되어 있고, 이를 받치는 첨차가 기둥 상부에서 빠져나와 그 중간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의 공포는 일본의 호류사금당(法隆寺金堂)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건물은 일본 아스카(飛鳥)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에 이르는 7세기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서, 당시 백제 건축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의 자료를 통하여 백제시대 공포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백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굽받침이 있는 주두와 소로를 사용하고 1주두 3소로의 형식을 취하고 운형(雲形)의 제공도 사용하였다고 추측된다.

② 건물 내외에 내민 첨차를 썼다.

③ 하앙을 사용하여 많은 양의 비에 견디는 처마를 짰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공포구조 역시 현존 유구로는 남아 있지 않지만, 1975년과 1976년에 발굴조사된 경주 안압지(雁鴨池)에서 출토된 유물 중 소로와 첨차 등을 보면 당시의 공포구조를 추측할 수 있는데, 이는 당나라 초기의 대안탑서문미석하각도(大雁塔西門楣石下刻圖)에 나타난 포작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또,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은 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의 집모양[家形]의 불감으로 신라건축의 좋은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공포가 잘 나타나 첨차의 모양 하나만으로도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신라 경덕왕 때의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 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에 그려진 공포도나 불국사 다보탑의 돌로 된 소로 등도 거의 같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두와 소로에 굽받침이 없고 굽부분은 입면으로 보아 만곡을 이루고 있다.

② 첨차에는 교두형(翹頭形:활처럼 깎아낸 모양)을 썼고 2면 또는 3면 직절하여 첨차 끝을 굴렸으며 첨차 상면에는 공안을 주었다.

③ 하앙구조도 썼던 것으로 추측되나, 한편 수평으로만 조립한 포작을 흔히 써서 고려시대의 포작을 발전시킬 전조로서의 발달된 포작을 사용하였다.

이상 기술한 삼국시대의 공포의 특징은 간결하면서도 구조적으로 견실하여 안정된 건축미를 보였다고 믿어진다. 즉, 포작에 있어 일출목(一出目) 이상을 별로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첨차는 단조로운 교두형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는 포작을 기둥 위에서만 짜지 않고 기둥과 기둥 사이 창방 위에도 사용하여 소위 공간포를 짰음을 방증자료로 보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초적 공포의 형식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발전하여 건축의장적 미와 구조적 기능을 동등히 조화시켜 상호 순화시키는 아름다운 포작을 꾸몄다.

따라서, 이른바 주심포계 형식(柱心包系形式)에서는 고려 중기 이후 교두형 첨차에서 벗어나 측면에서 볼 때 쌍S자형의 곡선을 보이는 장식적 기법이 생기게 되었고, 또 전통적 기법에다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다포계형식도 발전시켰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목조건물로는 안동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 영주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예산 수덕사대웅전(修德寺大雄殿), 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등이 있다. 이 중 봉정사극락전은 중수연대가 1363년으로 기록되어 가장 오래된 현존건물로 알려졌고, 포작의 짜임도 고식적(古式的)인 형태를 보인다.

이들 4개의 예 중에 봉정사극락전과 부석사무량수전은 같은 계통의 포작기법을 보이고 있고, 수덕사대웅전과 강릉객사문은 또다른 계통의 포작기법을 보이고 있어 이들의 발달과정이 주목된다.

즉, 전자의 둘은 주두 위에서 같은 규모와 형태의 두공첨차를 평면으로 보아 十자형으로 조립하여 올려서 규격화된 외형을 보였고, 후자의 경우 주두 밑에 헛첨차를 두면서 그 위에 건물 내외로 뻗어 내민 첨차나 쇠서형의 제공을 두고 첨차의 곡선도 뚜렷하여 전자보다는 훨씬 장식적이다.

또, 고려시대는 주두의 곡선과 굽받침이 아직 완전히 퇴화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 수덕사대웅전 · 강릉객사문 · 부석사무량수전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특히, 중도리나 중도리를 받는 대공에 ‘∧’모양 대공이나 포대공 또는 파련포대공(波蓮包臺工)을 혼용하여 장식적으로 짜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의 주심포형식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다포형식의 예로는 북한에 있는 심원사보광전(心源寺普光殿) · 석왕사응진전(釋王寺應眞殿) 등이 있는데, 이들 공포작의 특징은 주두나 소로굽에 곡과 받침이 완전히 없어지고 첨차는 공안을 둔 교두형이고 쇠서의 끝이 투박하고 밑으로 경사져 뻗었으며, 내 · 외 출목을 2개 이상 두고 있어 주심포보다 조립이 복잡해진 점이다.

또, 여기서는 포작을 주심포작 이외 공간포를 평방 위에 배열하였다. 이상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시대는 주심포와 다포형식의 포작기법이 뚜렷이 갈려 서로 다른 형식을 나타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공포는 다양하고 장식적이며 복잡해진다. 이 시기는 주심포보다도 다포계 건축이 더 많이 쓰인 듯한데, 후기로 내려오면서 차차 출목의 수도 더욱 늘어나고 쇠서의 조각도 뾰족하게 곡을 두고 있으며, 내측의 양봉(樑奉)도 초화문(草花文)이나 운공형식(雲工形式)의 굴곡된 형태를 보인다.

반면, 지붕밑의 가구는 단조로워서 포대공은 점차 사라져갔다. 조선 중기에 와서 건물구조의 간소화를 위하여 익공계형식(翼工系形式)이 발전되는데, 1익공과 2익공이 흔히 쓰여 전자의 경우 첨차가 없어 쇠서와 같은 익공을 주두 밑에서 외부로 돌출시켜 그 위에 바로 보를 얹어놓았다.

2익공인 경우 그 위에 또 하나의 익공을 포개어 올리게 되는데, 이 때 출목을 두어 첨차와 같이 짜는 것과 출목 없이 주심에서만 도리를 받는 경우가 있다. 익공계형식은 구조가 간결하여 가구가 견실하고 경제적이어서 조선 중기 이후 흔히 사용하였다.

이 시대 또 하나의 형식으로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유구가 있는데, 그것은 완주 화암사극락전(花巖寺極樂殿)의 하앙형식의 구조이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다포계형식을 취하면서 하앙을 건물 내부 중도리에 고정시켜 공포 위를 걸치게 되어 처마를 받치는 것이 마치 지렛대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러한 하앙형식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아직도 오래된 실례가 많이 남아 있다.

우리 나라 목조건축의 구조형식을 구분하면, 첫째 주심포형식, 둘째 다포형식, 셋째 익공형식, 넷째 하앙형식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주심포의 포작은 기둥 위에서만 짜여지는데 모두가 처마도리를 받는 일출목의 구조를 두어 처마를 길게 내밀었다.

이것이 뻗침구조로 이용될 뿐 아니라 포작 위로 건너지른 대들보가 기둥 위에서 맞추어질 때 보강재로서의 기능도 가지게 된다.

특히, 주심포작에서는 보의 머리가 주심에서 수장폭(修裝幅)으로 좁아져 처마도리까지 뻗어나와 구조적으로 견실하다. 또, 지붕 하중의 전달은 주심포를 통하여 기둥에만 미쳐 벽체에는 하중이 거의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심포작에서는 기둥 상부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창방이 가늘고 약하다. 이러한 약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공포에 중방을 걸어 포작과 포작을 연결해주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주심포 중에서 헛첨차가 있는 경우 기둥과 보 맞춤에 더욱 이상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구조는 이후 발전된 익공형식과 상통하는 듯하다.

또, 주심포작의 가공은 곡선적이고 미적이며 아직 부재의 규격화를 완성시키지 못한 점도 그 특징이다. 그러므로 건물 내외 가구 가공기법도 부재 하나하나에 대하여 섬세성을 보이고 있어 가구재를 노출시키는 데 손색이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주심포계 건물에서는 반자 없는 연등천장을 사용한다.

주심포 건물의 가구는 기둥과 공포 · 대들보 · 포대공 · 종보 등 횡단면의 가구가 강조되어 주구조를 이루었고, 세로 방향의 횡가재(橫架材)는 이들 주가구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기능을 미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미적으로 처리된 주가구를 노출시키기 위하여는 맞배지붕이라야 효과적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주심포 건물은 맞배지붕을 한다.

전술한 현존하는 고려시대 주심포계 건물 외에 조선시대의 주요례로는 무위사극락전(無爲寺極樂殿) ·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 · 은해사거조암영산전(銀海寺居祖庵靈山殿) · 도갑사해탈문(道岬寺解脫門) · 개목사원통전(開目寺圓通殿) 등 많은 실례가 있다.

다포의 구조형식은 주심포와 많은 점에서 다르다. 우선, 규격화된 부재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변화없이 단조로운 포작의 특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공포의 미는 반복되는 리듬으로써 기계적 미감을 느끼게 한다.

주두 · 소로 · 첨차 등은 원래 어려운 조각곡선을 피하였고, 공포의 짜임은 기둥 위에서만 짜이지 않고 기둥과 기둥 사이 처마 밑에도 배열한다.

따라서, 주심포 구조에서 가냘펐던 창방은 굵어지고 여기에 더 보강하여 평방을 놓고 그 위에서 주두와 포작을 배열한다. 포작은 소첨 · 대첨을 겹쳐 내외의 출목을 차차 내밀게 하는 다중(多重)의 구조로서, 내외 1출목에서 5출목까지도 사용되고, 마지막 출목재 위에 내 · 외목 도리를 얹어놓아 처마는 외부로 더욱 길게 뻗어내릴 수 있다.

대들보는 구조상 외목도리까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주심도리 부근에서 끊기지만 보 밑이 공포에 결구되어 안전하다. 여기서는 포작 자체가 종횡으로 뻗칠 수 있어 공간포도 구조적으로 중요기능을 가지게 되고, 그 위에 얹히는 도리나 장여가 공간포 위에서 이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따라서, 지붕의 하중은 주심포의 경우와 같이 모두 기둥에만 전달되지 않고, 공간포를 통하여 벽과 벽훤(壁楦)에도 전달된다.

포작의 배열은 건물 전후면 뿐만 아니라 측면에도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고, 이러한 형식은 전술한 주심포의 주가구 개념을 흐리게 함으로써 건물의 종횡을 같은 무게의 축(軸)으로 보게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맞배지붕이 아닌 팔작 또는 우진각 지붕으로 처리하여, 외부로 나타난 포작의 배열을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지붕이 팔작이나 우진각일 때 지붕 밑에 합각부분과 선자연의 정점 처리는 어렵고 미관상 좋지 않으며, 또 다포작 구조로 인한 건물 내부공간의 확장으로 내부반자를 설치함이 유리하므로, 다포계 건물인 경우 대부분 우물반자를 설치하여 장식한다.

다포작의 형식은 말기에 와서 지나친 장식으로 그 미를 잃고 결국 퇴화하고 마는데, 이 때는 가냘프고 번잡한 부재, 즉 수서[垂舌] · 앙서[仰舌] · 연봉(蓮峯) · 운공 등을 조각한 공포와 기둥에 붙인 낙양(落陽) 등을 사용하게 되며, 이들은 조잡한 기법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전술한 고려시대의 현존하는 다포계 건축의 예 이외에 조선 초기의 예로서 서울남대문 · 개심사대웅전(開心寺大雄殿) · 봉정사대웅전 등, 중기의 예로서 통도사대웅전 · 창경궁명정전(昌慶宮明政殿) 등, 후기의 예로서 경복궁근정전(景福宮勤政殿) · 서울 동대문 등이 있다.

익공형식의 구조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간결한 포작구조이다. 이 형식의 발전은 구조적으로는 민가건축에서 기둥의 맞춤을 보다 보강하기 위하여 보 밑에 짧은 보강재를 덧대어 기둥 상부에서 내외로 관통시킨 구조에서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고, 형식적으로는 주심포계 구조를 간소화시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구조는 익공재를 기둥 윗부분의 내외로 관통시켜 보를 바로 받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견고하며 지붕처리도 맞배에서 팔작 · 우진각 등 마음대로 할 수 있다.

2익공인 경우 1익공재 위에 재주두(再柱枓)를 놓고 그 위에 2익공재와 보를 얹어놓기 때문에, 창방과 도리 사이가 자연 떨어지게 되어 여기에 화반(花盤)같은 것을 배열하여 기둥과 기둥 사이의 처마 밑을 장식해 준다.

이와 같은 화반의 배열은 주심포계 건물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현존하는 익공계 건물의 실례로는 봉정사화엄강당 등 조선 중기 이전의 예도 있지만,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서 종묘 정전(正殿) · 영녕전(永寧殿) · 경복궁경회루 · 창덕궁주합루 등, 특히 누정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하앙형식은 우리 나라에서 그 실례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구조 특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앞에서 말한 완주 화암사극락전은 다포계의 하앙구조를 보이는 건물로서, 포작은 내삼출목 · 외이출목으로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다포작의 특징을 보이면서, 제3·4단의 살미[山彌] 외부 끝이 경사지게 잘리면서 중도에서부터 내리뻗은 하앙재가 얹혀졌다.

이 하앙재의 외부 끝은 전면에 용을 조각하였고 후면은 뾰족하게 비스듬히 절단되었다. 이 끝부분에 소로와 도리를 놓아 처마를 받쳤는데, 주심도리와 처마도리의 거리가 약 1.3m로 다른 주심포나 다포계 구조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하앙 뒤에도 보강재가 있어 처마 내밈의 안전도를 가해준다. 따라서, 처마의 내밈도 전면이 약 3m로서 다른 건물보다 훨씬 깊다.

중국의 하앙은 이보다 복잡하여 하앙재와 상앙재를 두고 있으며, 하앙재가 1개에서 3개까지 겹쳐나와 그 끝은 내리뻗은 쇠서와 같은 형태를 한다. 이 하앙재의 수에 따라 1초(一抄)에서 3초(三抄) 등으로 부른다. 일본에서도 오다루키(尾棰)라고 하여, 고대건축의 실례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하앙의 맞춤은 수평으로 자른 공포작 중간을 경사진 부재가 관통하여 짜여지기 때문에 그 구법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참고문헌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
『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慶宮修理都監儀軌)』
『한국건축사』(윤장섭, 동명사, 1973)
『한국건축양식론』(정인국, 일지사, 1974)
『한국의 고건축』 1∼8(문화재관리국, 1973∼1986)
『管造法式の硏究』(竹島卓一, 美術出版, 1970)
「한국목조건축에 나타난 포에 관한 연구」(장경호, 홍익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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