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1년(선조 34)에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발의한 뒤, 왕명을 받은 통제사 이시언(李時彦)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아산의 현충사(顯忠祠)나 통영의 충렬사(忠烈祠)보다 훨씬 앞서 세워져, 이순신을 모신 최초의 사당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여수 북쪽 약 5리 마래산(馬來山) 아래에 있다”고 하여, 지금의 덕충동 산기슭에 위치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에는 이순신을 주향으로 하고, 의민공 이억기(李億祺)와 좌찬성 안홍국(安弘國)을 좌우로 배향하였다. 사우를 건립한 뒤, 우부승지 김상용(金尙容)이 임금에게 청하여 비로소 사액(賜額)되었다. 1709년(숙종 35)에 충무공의 5대손인 이봉상(李鳳祥)이 사우의 면모를 갖추도록 하였고, 1732년(영조 8)에는 이명상이 제사를 계승하였다.
1870년(고종 7)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충민단(忠愍壇)만을 남기고 철거되었으며, 이후 충무공에 대한 제사는 옆에 자리한 석천사(石泉寺)에서 행해졌다. 1873년(고종 10)에 주민들이 힘을 합쳐 고쳐 세웠지만, 1919년에 일제에 의하여 다시 없어졌다. 1971년부터 여수의 유림(儒林)들이 ‘정화 5개년사업’을 펼쳐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78년에 정비가 완료되어 오늘에 이른다.
사당은 아담하고 작은 공간에 남쪽을 향해 자리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서남쪽 앞뜰에는 옛 건물의 주춧돌이 보관되어 있고, 바로 서쪽에는 새로 세운 비가 놓여 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이익공 건물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기단은 3벌대의 장대석을 쌓아 만들고 전면에는 중앙에 넓은 계단을, 그리고 그 좌우에는 좁은 계단을 놓았다. 중앙 계단 앞에는 신문(神門)과 연결하여 신도(神道)를 화강석으로 가공하여 포장하였다. 건물의 전면은 띠살분합문을 두고 그 외에는 벽으로 마감하였다. 또 건물에는 모로단청을 하여 깨끗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