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관우(關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서 임진왜란 뒤인 1601년(선조 34)에 세워졌다. 정식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며, 조선 말 관왕을 관제(關帝)로 숭상하여 관제묘라고도 하였다. 관왕묘는 공자(孔子)를 모시는 문묘(文廟)에 대하여 무장을 모시는 무묘(武廟)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동관왕묘 외에 1598년(선조 31) 남관왕묘(南關王廟), 1883년(고종 20) 북묘, 1902년에 서묘가 세워졌으나 현재는 동묘만이 남아 있다.
관왕묘의 설치에 대하여는 세종 때 훈련원 안에 무묘를 설치하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뒤 비로소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던 명나라 장군 진인(陳璘)이 부상으로 서울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때 거처하던 후원에 관왕묘를 건립한 것이 남관왕묘이다. 그 뒤 역시 명나라 사람에 의하여 동대문 밖에 동관왕묘가 설치되었으며, 숙종 때부터는 왕이 능행(陵幸) 때 관왕묘에 들르기도 하였다.
동묘는 장방형 대지에 건물을 남북축선상에 배치하여 남쪽에 대문이 놓이고 대문을 들어서면 동쪽에 네모나게 쌓은 석단(石壇)이 있고, 그 옆에 제사를 모시는 사람의 거처가 있으며 대문 뒤에는 축선에 맞추어 중문이 놓인다.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정전이 놓이고 그 앞 좌우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놓여 있다. 정전은 정면 5칸, 측면 6칸의 익공양식으로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넓은 기단 위에 다시 한단을 높인 건물기단을 두고 둥근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공포(栱包)는 익공계(翼工系) 형식이며 화반(花盤)같은 후기양식을 보이고 있다. 내부는 본실과 전실로 구분하였으며, 건물 전면을 제외하고는 3면에 좁은 툇간을 두고 열주(列柱)를 세웠다. 본실과 전실 사이에는 문짝을 달아 막았으며, 외부로 보아 좌우측면과 후면은 벽돌로 전체를 막고 뒷면 중앙에만 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측 벽에는 작은 홍예(虹霓)를 틀어 개구부를 마련하였고, 정면에는 전체에 특이한 양식의 살창문을 달았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본실에는 중앙 뒤쪽에 단을 만들어 관우의 본상을 안치하였으며, 그 앞 탁자 좌우에는 그의 권속(眷屬)인 관평(關平) · 주창(周倉) 등 네 사람의 상이 있다. 지붕은 이 집의 특수한 평면에 따라 만들어져 용마루가 T자형태인데, 전실의 지붕 양옆은 맞배의 박공을 가설하였고, 본실의 지붕은 팔작을 이루어 이들이 같이 연결된 형식을 하고 있다. 이 건물은 중국 묘사(廟祠) 건축의 영향을 받아 중국풍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평면에서 정면보다 측면이 길게 되어 안으로 깊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평면구성은 중국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 건물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