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왕후(端敬王后) 거창신씨(居昌愼氏, 14871557)는 1499년 진성대군(晉城大君)과 혼인해 부부인(府夫人)에 봉해졌으며, 1506년 진성대군이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으로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단경왕후의 고모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의 부인이며, 아버지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이 반정에 반대해 죽임을 당해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위되었다. 단경왕후는 1739년에서야 복위되고 묘소는 온릉(溫陵)으로 봉릉되어 왕릉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온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단릉(單陵) 봉분 주변에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곡담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 좌우로 망주석과 문석인, 석마(石馬)가 배치되어 있다. 능강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 비각(碑刻), 홍살문이 있으며, 수라간(水剌間)과 수복방(守僕房)은 남아 있지 않다.
온릉 재실(齋室)은 온릉 입구 덕양대로 우측이 일부 흔적만 남아 있으며, 현재 능역 안에 있는 한옥 건물은 1976년 이후 재실의 일부를 옮겨 놓은 것이다.
단경왕후 온릉은 173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돌거리들이 갖추어졌으며, 이 작품들은 18세기의 유명한 조각가이자 별간역인 최천약이 돌거리 제작 전반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문석인의 얼굴과 눈 표현 방법, 옷 앞자락이 살짝 접히는 모습은 이후 18세기 특징으로 자리하게 되며, 온릉 문석인은 그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사적 정식 명칭은 ‘양주 온릉(楊州 溫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