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돈암(遯菴).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세종 대에 장령·승지·공조참판·형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냈다. 1443년(세종 25)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민신(閔伸)·정창손(鄭昌孫)·하위지(河緯地)·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공법(貢法)을 논의하였다.
문종 때 병조판서를 지내고 1453년(단종 1) 이조판서가 되었다.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어린 임금 단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애쓰다가, 왕위를 엿보고 있던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의 적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부사(副使)로 지목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죽일 때, 수양대군의 심복인 정수충(鄭守忠)에 의하여, 일찍이 남몰래 안평대군과 사귀었으므로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으로 혐의를 받았다.
수양대군의 명을 받은 삼군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에 의하여 현릉(顯陵: 문종의 능) 비역(碑役)을 감독하던 중 참살되었다.
정조 때 관작이 회복, 신원되었다. 삼중신(三重臣)이라는 예칭(譽稱)으로 불린다. 공주 동학사에 있는 숙모전(肅慕殿)과 장릉(莊陵) 충신각(忠臣閣)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