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혜왕후 영흥최씨는 조선 태조의 어머니로 남편은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 1315~1360)이다. 의혜왕후의 자녀는 정화공주(貞和公主)와 조선 태조이다. 1392년 태조가 즉위하자 의비(懿妃)로 추존하고, 화릉(和陵)으로 추봉하였다.
1387년 이색이 지은 「전주이씨 이거삭방이래분묘기(全州李氏 移居朔方以來墳墓記)」에 따르면 1387년에 이자춘의 묘 아래에 영흥최씨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환조 정릉(定陵)과 의혜왕후 화릉은 처음 조영 시부터 상하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선 건국 뒤 왕릉에 준해 석물(石物)들이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사진을 보면 화릉 장명등 상단과 문석인(文石人) 복두(幞頭)가 동(銅)으로 보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서 잘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릉은 정릉과 위아래로 조성되어 있으며 각기 석물이 건립되어 있다. 정릉은 상하계(上下階) 2단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화릉은 상중하계(上中下階) 3단으로 되어 있다. 화릉의 상계에는 병풍석(屛風石)을 두른 봉분 앞에 혼유석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 주변에는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을 배치하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 석마(石馬), 하계에 무석인(武石人)과 석마가 건립되어 있다.
정릉과 화릉 정자각은 능 아래 80보, 홍살문은 정자각 남쪽 100보, 신도비는 정자각 서쪽 250보, 사지기비(四至記碑)는 정자각 서쪽 60보, 재실은 신도비 서북쪽 20보에 있다.
화릉은 조선 전기부터 정릉과 상하로 배치되어 고려 말 사대부묘와 조선 전기 추존왕릉의 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 병풍석에 난간석(欄干石)이 없는 것이나, 망주석이 설치되지 않은 점 등 15세기 조선의 일반 왕릉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