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국가들은 귀족 이외의 인민들을 양인과 노비로 나누고 양인에게 국가의 공공업무로서 각종 직책과 군역을 부과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법 제도로서 규정되는 데에는 원칙적으로 두 가지의 조건이 전제되었다. 하나는 이러한 ‘직역’이 개인의 노동력 제공으로 수행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역’, ‘인두세(人頭稅)’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 하나는 전문적인 직무자나 군인이 별도로 형성되어 있지 않고 농민이 수시로 국가적 직무에 동원되는 ‘병농 일치(兵農一致)’의 징발제도하에서 수행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농민이 농업에 전념하는 대신에 전문 군인을 양성하고 변경의 경계나 전쟁에 대비하는 비용을 납부하는 ‘병농분리(兵農分離)’의 제도로 전환되면서 양인의 ‘직역’ 수행도 소멸하였다. 또한 호적상에도 ‘직역’의 기재가 사라졌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왕조는 지속적으로 ‘병농 일치’의 군역제도를 유지했다. 특히 조선왕조는 고려왕조의 귀족 관료인 ‘양반(兩班)’을 비롯하여 국가의 공공업무 수행에 따르는 우대조치를 소멸시키고 모든 관직과 군역을 국역 의무사항으로 체계화했다. 원칙적으로 양인이면 모두 국역이 부과되는 한편, 과거를 통해 관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이러한 제도 개혁은 특권적인 권력 분산을 통제하고 모든 권력이 왕권으로 수렴되는 집권적인 인민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념에 기초해서 시행되었다.
조선 후기의 호적은 재정 및 군역 운영을 위한 기본대장으로 3년마다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개개인의 ‘직역’을 명시하도록 했다. 호적상의 직역 기재에는 전·현 관직명이나 품계(品階)를 비롯하여 각종 국가기관의 직책명과 군사기관의 군관, 군병명이 기재되었다.
여기에는 노직(老職), 납속(納粟)으로 얻은 품계명, 명예직도 포함되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科擧)의 1차 관문을 통과했을 뿐인 진사(進士), 생원(生員), 무과(武科)를 통과한 출신(出身)은 물론, 과거를 준비하여 학업에 종사하므로 당분간 군역부과를 연기할 수 있는 유학(幼學), 향교나 서원에서 학업에 종사하는 교생(校生), 원생(院生), 군역을 질 수 없는 질환을 가진 병인(病人), 맹인(盲人) 등, 직역을 수행하지 않는 이유와 관련한 지칭도 많았다. ‘양인(良人)’, ‘한량(閑良)’ 등, 아직은 군역 대상자로 존재함을 나타내는 명칭과 과거를 위해 유교적 소양이나 무도 연마에 종사한다는 ‘업유(業儒)’, ‘업무(業武)’, 서얼(庶孼)로서 과거 응시를 허락받았다는 ‘허통(許通)’ 등, 직접 직역을 수행하지 않는 부류들도 허다했다. 직역이 기재되는 자리에는 여기에 더 나아가 ‘노(奴)’, ‘비(婢)’라는 양천 신분제 상의 표기도 있다.
호적상 직역을 기재하는 난에는 관직과 군역 이외에도 위와 같이 국역에서 벗어나 있음을 나타내는 지칭이나, 신분만이 기재되기도 했다. 더구나 아예 직역이 기재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망라하여 호적의 직역 난에 기재되는, 혹은 아무런 기재도 없는, 하나의 기재 양식으로 ‘직역’을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법제적인 신분체계이며,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양반’, ‘상놈’하는 계층적 구분과는 다르다.
중국 고대사회에 연원을 갖는 ‘직역’은 특히 조선시대에 국가적 신분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제도로 정착했다. 그 제도는 호적 기재를 통해 시행되었는데, 직역명의 통계적 관찰에 의하면 18~19세기를 통해 직역별 비중에 큰 변화가 발견된다. 그것은 노비와 군역자가 감소하는 대신에 품계명을 쓰거나 특히 ‘유학’을 기록하는 자가 대거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군역자는 군사기관에 소속되어 직접 번을 서거나 훈련에 동원되어 점검을 받는 정군들과 노역 제공에 대신하여 재화를 납부하는 보인(保人)으로 존재했다. 그런데 장기에 걸쳐 이 자들이 감소하는 한편, 군역자들의 지방 군현별 총수, 즉 ‘군총(軍摠)’이 감소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형태로든 지역에 정해진 군역을 부담하면서도 단지 호적상 군역명을 기재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18세기 중엽에 지역별 군총이 고정화되면서 군역 부담이 지역주민 내부에 분담되는 경향을 띠어갔다. 상부기관에 지역의 정해진 군액(軍額)을 충당시킬 수 있다면, 지방관아는 어떠한 반대급부를 받는 대가로 호적상에 직역의 변경을 허락했다고 이해된다.
군역명 기재의 감소와 반대로 기존의 양반들이 주로 기재하던 ‘유학’과 같은 직역명을 기재하는 자가 대거 증가해 갔다. 이것은 실제로 평민들이 ‘신분상승’하여 사회적인 신분으로의 양반을 획득해간 것, 즉 양반화(兩班化)라기보다 ‘양반 지향적인’ 사람들이 호적상에 그러한 직역명 기재를 증가시켜 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실제로도 사회적 신분이 유동적이어서 어느 정도의 신분 이동이 가능했고, 그러한 변화가 법제적으로도 공인되어간 것은 사실이다.
대한제국 시기의 호적인 ‘광무 호적(光武戶籍)’에 호주에 한해서 ‘직업(職業)’을 기재하도록 했다. 조선왕조의 구호적에 사용되던 ‘직역’에 대신하는 것으로 기재되지만, 국가적 공공업무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은 근대적인 의미의 직업과도 거리감이 있었다. 거기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구분되는 동아시아 전통적인 인민의 직분(職分) 인식이 적용되었다. 식민지 시대에 들어와 ‘민적(民籍)’이라는 일본식 호적이 작성되기 시작할 때에 잠시 ‘양반(兩班)’, ‘농(農)’, ‘상인(商人)’ 등의 이름으로 신분을 표기하기도 했다.
조선왕조는 국가적 신분을 인민에 대한 일률적인 ‘직역’ 부과로 체계화했다. 고려왕조의 귀족이 관직을 독점하고 지방의 향리(鄕吏)가 지배적 계층으로 권력을 휘두르며 누리던 특권은 조선 전기를 통하여 점차 소멸하였다. 이와 동시에 직역 체계의 이러한 변화와 궤를 같이 하여 통치체제가 왕권을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되어갔다. 조선왕조 초기에 형성한 직역체계는 중국 고대사회의 ‘직역’ 제도와 이념에 연원을 둔다. 그러나 이것은 이후 중국 사회의 신분제 해체에 근거한 과거제(科擧制)와 군현제(郡縣制) 시행, 그것을 통한 통치체제의 중앙집권화 시도를 조선왕조에 시도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국가적 신분체계가 ‘직역’으로 존재하면서도 이동이 가능한 신분제의 유동성이 신분을 상승시키고자 하는 욕구를 증대시켰다. 반면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상층의 신분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도 동시에 활발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국가적 신분체계로서의 ‘직역’과 사회적 신분의 괴리 현상이 심화된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