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의 의미는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에서 통용되는 의미와 사료상의 용례 사이에 다소 차이가 있다. 전자의 전호는 배타적 토지 소유권의 확립 및 농업 경영 방식의 변동과 관련하여 성립하였다. 고려 후기에 농장(農庄)의 확대는 국가 수조지를 탈점(奪占)하거나 토지를 개간 · 매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농민들은 탈점을 통한 토지 겸병 과정에서 사민(私民)으로 흡수되어 ‘처간(處干)’이라 불리며 국가에 납부해야 할 부세까지 농장주에게 바쳤다. 이들은 고려 후기의 전호(佃戶)로 일컬어지는데 병작제(竝作制)의 전호와는 성격을 달리하였다. 계약에 근간을 둔 병작과 달리 처간으로 통칭되는 전호는 사민화(私民化)되어 농장에 예속된 존재였다.
조선 초기 토지에서 파생되는 권리는 소유권만이 아니었으며 과전법(科田法)에서 규정한 수조권(收租權)도 개재되어 있었다. ‘전주전객제(田主佃客制)’는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관계를 지칭하였다. 전주전객제에서 전주는 수조권을 부여받은 관료를, 전객은 실제로 토지를 소유하거나 농지를 경작하는 민을 가리켰다. 실제 토지 소유 혹은 경작 사정과 무관하게 ‘객(客)’으로 규정된 농민은 ‘전주전객제’의 변동에 따라 점차 변화해 갔다.
과전법으로 성립한 ‘전주전객제’는 15세기 후반부터 점차 약화되며 폐지되는 수순을 밟았다. 세종 대에 전주가 직접 답험(踏驗)하는 방식이 폐지되고 관답험(官踏驗)이 정착되며 전주의 권한은 한 단계 격하되었다. 세조 대에 직전제(職田制) 시행, 성종 대에 직접 수조(收租)의 차단 및 관수관급(官收官給)으로 이어지는 조치로 전주권(田主權)은 사실상 명목만 남게 되었다. 16세기 중엽 직전제의 운영 자체가 중단되고 임진왜란을 거치며 전주전객제는 해체를 맞게 된다. 수조권 분급의 소멸 이후 조선의 토지는 소유권에 입각한 관계가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조선 전기에 농업 경영은 노비의 노동력과 토지의 결합이 중심이 되었다. 농장 경영은 가작(家作) 및 작개(作介)-사경(私耕)이 높은 비중을 점하였고 병작제는 보조하는 형태를 띠었다. 15세기에 병작은 지주(地主)와 그의 노비가 아니라 농민과 농민 사이에서 이루어졌는데 노비와 같은 예속 노동력이 부족하거나 지주가 자경(自耕) 능력을 상실했을 때 제한적으로 행해졌다.
소유권 · 경작권 · 수조권 등으로 토지를 둘러싼 권리의 주체가 단일하지 않았던 까닭에 조선 전기 농업 경영에서는 신분제적 강제가 행해지고 있었다. 하나의 토지가 두 차례 매매되거나 전답의 소유자뿐 아니라 경작자도 ‘주(主)’로 규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토지의 권리 주체가 여러 사람일 수 있었기에 원활한 지대 수취를 위해 경제 외적 강제가 요구되었고 개간지에서 작개제의 시행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16세기 말엽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병작제는 배타적 소유권의 확립을 배경으로 하였다. 병작의 운영 원리는 계약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요소로서 작개제와 달리 경제 외적 강제에 의해 유지되는 방식이 아니었다. 토지 매매가 활성화되고 지주가 소유권을 배타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되며 강제력 없이 지대를 수취하는 병작제가 위치를 공고히 해나갔다. 15세기까지 주변부에 머물렀던 병작제는 16세기 후반부터 확대되었고, 17세기 중엽을 거치며 급속히 진행되었다.
조선 후기 병작반수(竝作半收)의 농업 경영 방식은 보편화되었다. 이른바 ‘지주전호제’의 전개이다. 여기에서 토지를 소유한 자는 ‘지주’, 그들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던 사람은 ‘전호’로 규정되었다. 전호는 본래 중국사에서 소작인에 해당하는 말로, 조선시대 병작제의 작인(作人)을 가리키는 용어로 도입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이러한 관계는 지주-소작으로 바뀌어 지칭되었다.
첫 번째 뜻의 전호는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에서 도출된 개념으로, 배타적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고 계약적 관계로 농업 경영 방식이 변화한 궤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 당대에 사용된 전호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고려시대에 처음 사료에 등장하여 조선 후기까지 사용된 전호의 의미는 두 번째 뜻의 전호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의 전호는 모든 토지를 국가의 소유로 간주한 ‘국전(國田)’ 이념에 바탕한 농민 규정으로 그 뜻이 확인된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전호의 예는 모두 1108년(예종 8)~1111년(예종 11)에 집중되었다. 전호 규정의 기초가 되는 국전 이념은 절대 왕권과 집권 관료제를 추구한 예종 대의 신법(新法) 사상과 관련되었다. 국전제적 농민 규정으로서 전호의 성립은 12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분권적 지방 세력의 소거와 중앙 권력의 토지 · 인민에 대한 일원적 지배 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 공전(公田) · 사전(私田)을 아우르는 모든 토지의 농민은 전객으로 불리었다. 과전법 개혁에 따라 관료들에게 지급된 분급 수조지 사전에서 수조권자인 관료는 전주, 농민은 전객으로 규정되었다. 여기서부터 조선 초기 사전의 농민은 전객으로 불렸다. 그런데 사전뿐 아니라 일반 민전(民田)인 공전의 농민 역시도 전객으로 불렸다. 사전 · 공전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농민이 공히 전객으로 규정되었던 배경에는 모든 토지를 국가 소유로 간주하여 국가를 주(主)로, 농민을 객(客)으로 두는 ‘국전(國田)’ 이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 농민을 전호로 칭한 예는 매우 드물지만 모두 전객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초 고려시대 사전(私田)의 농민은 전호로 불렸으며 조선 초기에도 전객 · 전호가 혼용되었다. 전호는 개간지의 소유권을 인정받은 자작농을 가리키기도 하여 공전의 전객 농민이 곧 전호로 별칭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호는 17세기 이후까지도 여전히 국가 지배 아래의 일반 농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조선 당대에 병작제의 차지농을 가리키는 일반적 호칭은 작인(作人)이었다. 조선 전(全) 기간에 걸쳐 전호의 용례는 나라의 땅을 경작하는 호(戶)라는 의미로 조선 왕조의 국전제 이념에 상응하는 농민 규정으로 확인된다. 조선 초기 전객과 동질적 존재로 그 별칭이었던 전호의 뜻은 조선 후기까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시대 사료에 처음 등장한 전호(②)의 의미가 조선 후기까지 변함이 없었던 반면, 조선의 전객(佃客) 규정은 변화를 거듭하였다. 1444년(세종 26)에 최종안으로 반포된 공법(貢法)에서 납세자를 ‘작자(作者)’로 규정한 점은 과전법의 전객 규정이 서서히 폐기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사실상의 토지 사유가 이루어지던 현실에 비추어 지나치게 이념적이었던 전객 규정은 마침내 『경국대전』 이래 전부(佃夫)로 변화되었다. 전부 규정은 과전법 이래 국전제 이념을 계승하면서도 농민의 사실상 토지 사유를 승인한 관계의 결과물이었다. 전부 규정은 18세기 중엽 『 속대전』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농민의 법적 · 사회경제적 지위를 규정하였던 공식 용어로 사용되었다.
국가의 법적인 규정과 독립적으로 사용된 전부는 17세기 무렵부터 병작제의 보편화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게 된다. 전부 · 전객은 의미가 반전되어 병작제 아래 차지농을 가리키는 말로 변화해 갔다. 전인(佃人), 전가(佃家) 역시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전(佃)’ 자체가 사적인 차지(借地)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로 일상화되고 있었다. 국가적 지배 아래의 자작농을 가리키던 전부가 병작제 아래 전주(田主)와 대비되는 차지농을 가리키는 말로 변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