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행수륙전은 조선 전기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치르는 수륙재(水陸齋)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사찰에 지급한 위전(位田)이다. 수륙재를 치르는 사찰에서는 위전에서 세를 거두어 행사 비용을 충당하였다. 중종 대 이후 국행수륙재가 중지됨에 따라 해당 위전의 명목도 사라졌다.
조선시대에 국행수륙재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의례를 올리던 사찰에 별도로 지급하던 위전(位田)이다. 위전을 받은 주체는 해당 토지에 수조권(收租權)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 광종 대에 처음 시행된 수륙재(水陸齋)는 물과 육지를 떠도는 영혼을 불법(佛法)으로 달래는 불교 의례의 일종이었다.
조선은 억불(抑佛)의 기조를 취하면서도 수륙재만큼은 국가의 공식적인 의례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유교적 국가의례가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수륙재의 기능은 여제(厲祭)로 넘어가게 되었다. 중종 대 이후 국행수륙재가 중단된 것은 이 때문이다.
태조는 수륙재를 1년에 2차례 정기적으로 설행하는 국가의례로 체계화하였다. 1394년(태조 3)에 삼척 · 강화 · 거제에서 공양왕 일가를 비롯한 왕씨 세력을 대대적으로 처형한 뒤, 이듬해인 1395년(태조 4)에 삼척의 삼화사(三和寺), 개성의 관음굴(觀音窟), 거제의 견암사(見巖寺) 등에서 이들의 천도를 기원하는 수륙재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1397년(태조 6)에는 중생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더해 수륙재를 확대 실시하였으며, 수륙재를 상설화하기 위하여 진관사(津寬寺)에 수륙사(水陸社)라는 기구도 만들었다.
국행수륙재의 비용은 의례를 담당하는 사찰에 수조지를 분급하여 마련하도록 하였는데, 해당 사찰은 수조권을 행사하여 비용을 충당하였다. 국행수륙전은 사사전(寺社田)과는 구분하여 별도로 지급되었다. 1424년(세종 6)에 개성의 관음굴과 진관사는 원속전(元屬田) 외에 수륙위전(水陸位田)의 명목으로 각각 100결씩 받았음이 확인된다.
하지만 조선 정부가 점차 각사를 비롯한 재정 주체가 독자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것을 지양하고, 호조에서 직접 세금을 거두어 1년의 경비에 맞춰 미곡을 나누어 주는 쪽으로 재정의 중앙집권화를 꾀하였다. 이런 상황이 되자 국행수륙전 역시 호조에서 수세하여 이를 해당 사찰에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성종 대 『 대전속록(大典續錄)』에는 호조가 하하년(下下年)을 기준으로 전세를 수취한 후, 당해 연분의 수세액에 맞춰 추가로 징수하여 이를 사찰에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중종 대 이후 국행수륙재를 중지하면서 국행수륙전 역시 점진적으로 폐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