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 왕조의 각급 기관은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각기 대규모로 둔전을 설치하였다. 둔전은 전쟁과 재난 등으로 발생한 대량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유민(流民)들을 안집(安集)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식되었기에 17세기 이후 전국에 광범위하게 설치되었다.
둔아병은 이러한 둔전을 경작하는 가장 대표적인 역종(役種) 가운데 하나였다. 훈련도감 · 총융청 · 수어청 등 여러 군사 기관은 둔전을 경작하기 위하여 토지를 잃고 유랑하는 유민들을 둔민(屯民)으로 모집하였다. 그들 가운데 군졸에 적합한 자들은 별도로 둔아병으로 선발하여 경작과 더불어 훈련 · 번상(番上) 숙위(宿衛) 등의 군사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둔아병은 본래 유민들을 안집하기 위하여 모집한 둔민들 가운데에서 선발되었기에, 그 역가(役價)가 비교적 가벼웠다. 이 때문에 17세기 후반까지 군역을 피하려는 이들이 둔아병으로 투속(投屬)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18세기를 전후하여 둔아병의 숫자와 둔전 경영에서 둔아병이 맡는 역할은 점차 축소되어 나갔다. 먼저, 숙종 대 이후 양역(良役) 사정(查正)의 흐름 속에서 각 기관 소속 둔아병의 군액(軍額)이 점차 축소되었다. 둔아병으로 투속한 이들에게 다른 역을 부과하는 조치가 실시된 것도 둔아병의 숫자를 줄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중반 시행된 균역법(均役法)으로 기타 군역의 부담도 크게 줄어들면서 둔아병으로 투속하는 일은 더욱 감소하였다. 아울러 18세기 이후 둔전의 경영에서 둔아병과 같은 예속 노동력을 사용한 부역제적 방식이 민결(民結)에 대한 수세(收稅)나 병작(竝作)과 같은 경제적 방식으로 대체되어 가면서 둔전 경영에 있어서 둔아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었다.
둔아병은 둔전이 설치된 이후 둔전의 농경 활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점차 둔전 경영이 부역제적 방식에서 민결 수세와 병작 등 경제적 방식으로 변화하면서 그 위상이 축소되었다. 둔아병 운영의 추이는 조선 후기 국가의 대민 지배와 토지 지배 방식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