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각사(各司)에 소속된 공노비 가운데 지방에 거주하는 노비가 신공(身貢)으로 납부하는 포목(布木)이다. 조선의 공노비는 소속 기관에 따라 중앙 각사에 소속된 각사노비(各司奴婢)와 지방 군현에 소속된 각관노비(各官奴婢)로 구별되며, 각사노비는 거주지에 따라 서울에 거주하는 경거노비(京居奴婢)와 지방에 거주하는 외방노비(外方奴婢)로 나뉜다.
경거노비는 대체로 입역하며, 외방노비는 선상(選上)이나 납공(納貢)의 형태로 역을 부담하였다. 신공은 지방의 노비를 뽑아서 중앙 각사로 보내지 않고, 도망(逃亡) · 노제(老除) · 물고(物故) 등의 사유가 없는 이들에게 거두어들였다. 신공은 미곡이나 비단 · 동전 · 은 등 다양한 형태였지만 포목이 가장 대표적이므로 대개 공포로 지칭되었다. 신공을 거두어들이고 관리하는 일은 본래 사섬시(司贍寺)가 담당하였으나, 1704년(숙종 28)에 사섬시가 호조로 통폐합된 뒤에는 호조에서 주관하였다.
납공노비는 태종 대에 대대적으로 혁파한 사원노비(寺院奴婢)를 관아로 넘기면서 그 수가 대폭 증가하였다. 1484년(성종 15)에 노비 추쇄를 끝낸 뒤 지방에 거주하거나 지방 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경외노비(京外奴婢)는 26만 1984명으로 파악되었는데, 1472년(성종 3) 선상하는 노비 및 그를 경제적으로 보조하는 봉족(奉足)이 대략 1만 2600명이었으므로 이를 제외한 납공노비는 대략 2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노비 추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그 액수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효종 초 노비안에 실린 숫자는 19만 명에 달하였으나 실제로 신공을 거둘 수 있는 노비는 2만 70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에 1655년(효종 6)부터 1657년(효종 8)까지 대대적인 추쇄를 단행하였으며 그 결과 신공을 거둘 수 있는 노비는 8만 2821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때 정점을 찍은 노비의 숫자는 18세기 들어 계속 줄어 1750년(영조 26)에 3만 617명, 1801년(순조 원년)에는 2만 9093명에 지나지 않았다. 노비 총수가 줄어든 데에는 노비를 속량하거나 노비가 도망친 때문이기도 하지만, 18세기 들어 양역변통론을 거치면서 다수의 공노비가 양역 자원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노비가 내야 하는 신공 액수는 시대마다 달랐다. 『경국대전』에는 노(奴)는 면포(綿布) 1필과 저화(楮貨) 20장, 비(婢)는 면포 1필과 저화 10장을 내도록 규정되었다. 저화가 쓰이지 않게 된 뒤로는 노가 면포 2필, 비가 면포 1필 반의 수준으로 조정되었다.
현종 때에는 다시 신공이 반 필씩 경감되어 노 1필 반, 비 1필씩 부담시켰다. 영조 때에는 1755년(영조 31) 노 1필, 비 반 필, 1774년(영조 50)에는 아예 비공(婢貢)이 폐지되었다. 균역법에서 양인 1인당 군포 1필씩 부담하는 것과 균형을 맞추었던 것이다.
가호 단위로 본다면 노비 가호의 신공 1필은 양인의 군포 1필과 사실상 동일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후 노비의 신공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개별 노비의 수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총액에 맞춰 부과하는 비총(比摠)의 관행이 점차 정착하였다. 1801년(순조 원년)에 내시노비(內寺奴婢) 혁파는 이러한 신공 수취를 폐지하고 왕실과 중앙 각사 소속의 납공노비 6만 6067구를 양인으로 전환한 조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