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공주·옹주·군주·현주 등과 혼인한 부마의 관서이다. 부마는 조선 초기에는 공신과 함께 이성제군부에 소속되었다. 부마의 처우는 태종, 세종 대를 거치면서 정리되었고 특히 세종 때에 부마를 의빈이라 칭하고 부마의 과전도 정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봉군을 종친에게만 적용하고자 하여 부마의 봉군법을 폐지하였다. 의빈에게 산관을 제수하며 이성제군부를 부마부로 개칭하고 관서의 서무를 관장할 관원을 두었다. 그후 부마부는 세조가 관제 개정을 할 때에 의빈부로 개칭되어 1894년 종정부에 합병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부마(駙馬)와 공신(功臣)을 이성제군부(異姓諸君府)에 소속시켰다. 1408년(태종 8) 처음으로 제군(諸君) · 삼공신(三功臣)과 함께 부마에게도 반당(伴倘) 10명을 배정하였다. 1414년(태종 14) 형조에서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노비의 한도를 정할 때 부마 1품에게는 노비 150구(口), 2품 이하는 130구로 제한했지만 시행되지 않다가 1415년에 다시 정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1417년 부마제군의 봉작(封爵)을 전례에 따라 공신제군(功臣諸君)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1426년(세종 8) 종친의 과전법을 제정할 때 공주의 남편은 250결, 옹주의 남편은 150결로 정하였으나, 이후 1440년(세종 22) 공주에게 장가든 부마의 과전(科田)을 220결로 개정하였다.
1434년(세종 16) 부마의 명칭을 의빈(儀賓)으로 개칭하였다. 1444년(세종 26) 세종은 부마, 공신, 중궁의 부친을 군으로 봉하던 제도[封君]를 폐지하면서 부마의 칭호를 고전(古典)에서 참고하라고 하였다. 이에 이조에서는 중국 제도에 의거하여 부마에게 봉군하지 말고, 산관(散官) 제도를 만들어 제수하고, 녹봉과 좌목 등의 일은 전례대로 하자고 하였다. 또한 부마가 속했던 이성제군부는 부마부로 개칭하여 아문을 만들고 한직의 관원으로 경력과 도사를 두어 관서의 서무를 맡게 하였다. 세종은 1445년 각사의 공해전을 모두 혁파할 때에도 부마부의 250결과 기로소 100결만은 남겨두로록 하여 부마부의 재정을 확보해 주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부마에게 산관을 제수하면 칭호가 혼동되어 분별하기 어려우니 전일에 봉한 주 · 현의 호(號)를 넣어서 모위(某尉)라 칭하였다.
1466년(세조 12) 관제 개정 때에 부마부를 의빈부로 개칭하고, 의빈을 두되 품계에 차별을 두어 의빈(儀賓)은 정(正) · 종(從)1품, 승빈(承賓)은 정 · 종2품, 부빈(副賓)은 정3품, 첨빈(僉賓)은 종3품으로 하였다. 그러나 품계의 구별 없이 모두 의빈이라 칭하게 되면서, 자연히 신분의 높고 낮음을 분별하기 어려운 폐단이 나타났다. 그래서 1484년(성종 15) 3월 의빈 홍상(洪常)의 청을 받아들여 2품 이상을 위(尉), 3품 당상(堂上)을 부위(副尉), 3품 당하(堂下)에서 4품까지를 첨위(僉尉)라고 부르게 되었다. 『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위는 정1품에서 종2품까지의 구별이 있었다. 공주에게 장가든 자에게는 처음에 종1품의 위를 주었으며, 옹주에게 장가든 자에게는 처음에 종2품의 위를 주었다. 부위는 군주(郡主)에게 장가든 자에게, 첨위는 현주(縣主)에게 장가든 자에게 각각 처음으로 주는 위계였으며 이들 의빈들은 정원이 없었다.
의빈부에는 사무를 맡아보던 관원으로 경력(종4품) · 도사(종5품) 각 1인을 두었으며, 이속(吏屬)으로는 녹사 1인, 서리 4인 등을 두었는데, 『 속대전(續大典)』에서 경력이 감원되었다. 그 뒤 1894년(고종 31) 종정부(宗正府)에 합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