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봉작(封爵)이란 ‘작(爵)을 봉한다’라고 풀어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 명사로 사용할 수도 있다. 사료에서는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외에 일반 관직을 작 혹은 관작(官爵)으로 표현하는 수도 있으나, 봉작이라고 할 때는 공·후·백·자·남의 작을 수여하는 것만을 의미한다. 그것은 봉(封)에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봉작 외에 ‘○○군(君)’으로 봉해주는 봉군(封君)이 있는데, 넓은 의미에서 봉군도 봉작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사용상의 의미가 다르다. 작의 범위에 공·후·백·자·남 외에 군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부터 봉작과 봉군이 명확히 구별되면서 그 역사성을 갖게 되었다. 사서에서 단편적으로 봉작·봉군하는 것 외에 봉작제는 고려 문종 때, 봉군제는 고려 충선왕 때에 제도화되었다. 그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에는 자료가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경우 양국군(讓國君)·안국군(安國君) 등으로 봉해준 예가 보이고, 백제의 경우 비록 5세기에 한정된 것이긴 하나 면중왕(面中王)·도한왕(都漢王)·불사후(弗斯侯)·면중후(面中侯) 등의 봉작의 예가 다수 보인다. 신라의 경우에도 상사서(賞賜署) 내지 사훈감(司勳監)이 있었는데, 이로 보아, 삼국시대에 봉작에 대한 어떤 제도화된 형태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봉군제와 봉작제가 기록상으로 명확하게 나타나는 때는 고려시대부터이다. 즉 봉군(封君)은 국초에 종친을 원군(院君)·대군(大君)이라 칭하고, 또 이성제군(異姓諸君)이 처음에 공·후·백·자·남의 5등 봉작제를 썼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고려시대의 봉작제는 현종 이후에 공·후를 봉하였다고만 간단히 보일 뿐, 명확한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980년(경종 5) 최지몽(崔知夢)이 처음으로 동래군후(東萊郡侯)로 봉해진 뒤 봉군한 사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5등 봉작제는 실제로 경종 때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이 제도적으로 정비된 것은 문종 때이다.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 의하면, 국공(國公)·군공(郡公)·현후(縣侯)·현백(縣伯)·개국자(開國子)·현남(縣男)의 등급과 그에 따른 식읍과 관품을 정하고 있다. 그 실례를 기록에서 찾아보면, 왕족은 공·후·백의 호를 많이 사용하였고 상서령(尙書令)·중서령(中書令)이나 태위(太尉)·사공(司空)을 병용하였다. 반면 비왕족은 국공·군공·군후·현후·군백·현백·현자·군남·현남 등에 제수되었다.
이후 봉작제는 1298년(충렬왕 24) 1월, 충선왕이 관제를 개혁하여 봉군제로 바꾸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봉군제가 대국(大國)을 의식한 상피제(相避制)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즉, 원(元)의 간섭 아래 충선왕이 봉작제를 봉군제로 개칭하였다가 1356년(공민왕 5) 7월에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쓰면서 관제를 개혁하여 봉작제로 바꾸었고, 1362년(공민왕 11)에 원의 압력으로 또 관제를 개혁할 때 다시 봉군제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는 처음 충선왕이 정한 봉군제를 쓰다가 1398년(태조 7) 9월에 공·후·백의 봉작제로 고쳤다. 이것은 명의 거듭된 무리한 요구로 관계가 악화되어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도중에 이루어진 것 같지만 잠깐일 뿐이고, 1401년(태종 1) 1월에 태종이 중국의 명호를 외람되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다시 봉군제로 변경한 것이다. 봉작제는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될 때 부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