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에 보이는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을 계승하여 고려에 이르러 민전이라는 용어로 『 고려사(高麗史)』에 처음 등장한다. 연수유전답에서 민전으로 변화한 것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 말 신라 초를 거치면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는 가운데 농민의 토지를 항상적으로 관리하면서 소유권이 성장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민전은 공전(公田), 사전(私田)과 함께 고려시대의 중요한 토지 개념으로, 공전과 사전의 기반이 되는 토지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양전(量田) 대상이며 수세 대상이 되는 토지라는 측면에서 국가 수조지로서 공전으로 파악되기도 하며, 개인 관료에게 지급되는 전시과(田柴科)의 분급 토지로서 사전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민전은 국가 수조지가 될 수도 있고 분급 수조지가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양면성을 가진다. 이러한 이유는 고려시대가 전시과라는 국가적 토지분급제가 시행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전시과- 녹과전(祿科田)- 과전법(科田法)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토지분급제는 개인 사유지인 민전에 대해 국가가 개인 관료에게 수조권(收租權)을 분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때 국가가 민전에서 거두어들이는 수조율과 개인 관료가 민전에서 거두어들이는 수조율은 똑같이 1/10조라고 파악한다. 이는 1960년대 이후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토지사유론이 등장하면서 나타난 이해 방식이며, 현재 한국 사학계의 통설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토지국유론의 관점에서 보면 해석은 달라진다. 토지국유론에서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며, 민전 역시 일반 농민층이 소유한 토지가 아니라 국가의 토지이기 때문에 농민은 경작권을 가지고 있는 데에 불과하다고 본다. 따라서 국가가 민전에서 거두어들이는 수조율은 1/10이 아니라 1/4 또는 1/2로 보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권78, 식화(食貨)1, 경리(經理)조에는 민전에 관한 기록이 다수 보인다. 1041년(정종 7)의 기록에 따르면 상주(尙州) 관내에 있는 몇 개의 속현(屬縣)에서 민전의 많고 적음과 비옥하고 척박함이 고르지 않아 양전하여 식역을 고르게 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1059년(문종 13) 서북면 병마사(兵馬使)의 건의에 따르면, “안북도호(安北都護) 및 귀주(龜州) · 태주(泰州) · 영주(靈州) · 위주(渭州) 등의 주(州)와 통해현(通海縣)의 민전은 헤아려 지급한지가 이미 오래되어 비옥함과 척박함이 고르지 않으니, 사자를 파견하여 고르게 책정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여 마치 국가가 민전을 백성들에게 지급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에 관해 토지국유론의 입장에 선 논자들은 고려에 균전제(均田制)가 시행된 것으로 보면서 민전의 많고 적음과 비척도에 따라 국가가 균등하게 토지를 지급하였으며, 고려 말 이래 사유화가 진전되어 조선시대에 와서 민전이 사유지로 발전한 것으로 본다(深谷敏鐵). 이와 관련하여 고려 후기, 사전의 혁파를 주장하였던 사전혁파론자들의 인식 속에서도 고려의 토지제도가 중국 삼대(三代)의 정전제(井田制)를 계승하여 균전제가 시행되었던 것처럼 설명하는 인식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토지사유론의 입장에 선 논자들은 이러한 설명 역시 왕토 이념에 분식된 당시 토지제도를 잘못 인식한 데에서 비롯되었음을 비판한다. 민전은 명백히 농민의 소유권과 경작권이 보장된 농민 소유지로 파악하고 있으며, 국가에 필요한 국용과 녹봉 등 소요 재원을 민전에서 수취한 조세를 통해서 마련하였다고 파악한다(김용섭, 이성무, 안병우, 하태규, 이경식, 위은숙, 김재명). 민전상에 다양한 방식의 소작제가 존재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안병우).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공전 조율로 1/4을 수취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민전을 사유지로 보면서도 계층 미분화 상태의 농민들이 촌락 내부의 공동체적 유대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강진철, 旗田巍). 한편 양계(兩界) 지역의 민전은 지역적 특성상 국가가 지급한 토지일 수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정종한), 민전은 사유지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신은제). 또한 고려의 공전 조율을 1/4로 보면서 1/10 수조율은 고려 말 사전혁파론자(私田革罷論者)들이 주장한 이상적 수조율이라고 보기도 한다(최이돈).
과전법은 경기(京畿) 사전의 원칙에 따라 과전을 경기 내에서 지급하고 외방의 사전은 혁파되었다. 외방의 사전은 1/10조를 거두는 국가 수조지로 재편되어 민전의 소유지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과전법을 마지막으로 직전법(職田法),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거쳐 국가적 토지분급제는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토지에서 소유권적 구분이 더욱 선명해졌다.
유토(有土)와 무토(無土)의 구분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유토면세전(有土免稅田)인 궁방전(宮房田)은 궁방의 사유지로서 전호(佃戶) 농민에게 경작시켜 절반 정도의 조를 수취하고 국가로부터 면세를 받았다. 반면에 무토면세전(無土免稅田)은 일반 민전에 대한 수조권을 궁방에 지급한 토지로서, 민전의 전주(田主)는 국가에 전세를 납부하는 대신 궁가(宮家)에 납부하고 궁가는 면세를 받았다. 이처럼 민전은 개인의 사유지라는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