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반 관료가 국가에 충성하며 관직에 복무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지급된 토지였다. 그러나 단순히 봉직에 대한 급여로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관인의 신분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고려 왕조에서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이들을 위하여 토지제도를 마련한 것은 940년(태조 23)에 설치한 역분전에서 시작되어 1076년(문종 30) 경정전시과에서 일단락된다. 전시과의 분급 대상은 문무반과 군인, 서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부류는 문무 양반이었다. 이들이 전시과 규정에 따라 지급받는 토지를 양반전 혹은 양반과전이라고 불렀다.
양반전의 실체에 대해서는 그동안 어떠한 토지를 받았는가, 토지에 대한 지배권은 어떤 것인가, 해당 토지의 경영은 어떻게 하였는가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양반전의 계보를 나말여초에 호족이 소유하던 전장(田莊)에 연결시켜서 이해하였다.
이에 따르면 호족이 소유하던 대규모의 사유지가 고려 건국 이후 국가의 추인 아래 전시과라는 토지제도로 편입, 재분배되었다. 하지만 양반전은 종래의 소유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수조권만을 지급하였고, 다만 이전의 토지 경영 방식인 지주 전호제에 따른 병작반수의 관행을 인정하여 전주인 양반이 농민 전호에게 1/2조를 수취하였다.
이후 고려에서 사적 토지 소유가 진전되었다고 이해하면서 민전(民田) 위에 수조권이 설정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등장하였다. 민전의 주인은 대다수가 일반 농민이었고 이들의 사유지에 국가가 단지 수조권만을 허락한 것이 양반전의 실체였다는 의견이다. 그렇기 때문에 1/2조와 같이 과도하게 수취할 수 없었고, 양인이 국가에 바치는 전조(田租)와 마찬가지로 수확의 1/10을 수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양반전에 대한 이해는 토지의 성격과 지배의 실체를 두고서 극명하게 갈리는데, 현재는 대체로 후자의 견해가 지배적인 학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양반전이 민전에 대한 수조권의 지급이라고 한다면, 민전은 전국에 분포하고 있었으므로 양반전 역시 개경은 물론 지방에도 존재하였다. 다만 양계 지역은 군사적 성격이 농후한 특수성이 인정되어 전시과와 같은 사전이 설정되지 않았다.
한편 이상의 이해와는 전혀 다르게 양반전은 양반 본인의 토지 위에 수조권이 설정된, 이른바 면조권(免租權)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논의되었다. 내용은 조금씩 상이하지만 고려시대에는 휴한농법(休閑農法)과 같은 제약으로 인해 농민층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고, 민전에 기초하는 전면적인 수조권 분급제의 실시는 시기상조였다는 의견이다. 덧붙여서 양반전으로 지급되는 토지의 전품(田品)이 문제되지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에도 면조권설의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양반전을 회수하여 타인에게 지급하는 사료에 대한 해석, 면조를 위한 토지소유가 전제되어야 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면조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러므로 현재는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수조권설을 기반으로 하면서 면조권도 부여된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
이 외에 양반전을 비롯한 전시과의 토지는 고려의 특수 행정 구역인 부곡에 설정되었으며, 부곡민이 토지를 경작하여 1/4조를 바쳤다고 이해하거나, 민전에 수조권이 설정된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전호제 경영이 이루어지는 특수한 토지로서 국가가 농민을 공권력에 동원하여 경작하게 하는 토지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양반전은 면조권이 부여된 특수한 토지로서 양반 개인이 아닌 가문의 지배지이며, 경작 전호에게 지대에 해당하는 1/2의 조를 받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양반전은 곧 가문이 직접 경영하는 토지이자 봉건 영주의 직영지와 같은 것으로 식실봉(食實封)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양반전의 수조율과 토지 지배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논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양반전의 세습과 관련해서는 대체로 이해가 같다. 본래 양반전은 수급자 본인이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하는 토지이고 직무에 대한 보수이므로 당연한 이치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군인 및 서리의 경우 자손의 직역 계승을 매개로 토지를 이어받는 전정연립(田丁連立)이 적용되었듯이 양반도 자손에게 토지를 물려줄 수 있도록 배려하였던 것이다. 이로 보아 양반전은 보수 이외에 관인 신분을 보장하는 기능도 함께 하였다고 여겨진다.
양반전은 그 용어만 보면 토지의 지급에 그친 것으로 보이지만, 전시과에 규정된 것처럼 시지(柴地)가 함께 지급되었다. 시지는 땔감을 구할 수 있는 초채지(樵採地)로서 농경지인 전지(田地)와 더불어 생활에 기초적인 물품을 제공하여 주었다. 한편으로는 시지를 개간할 경우 농경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고도 여겨지는데 구체적인 근거가 부족하여 아직은 추정에 불과한 형편이다.
양반 관료제의 확립과 병행하여 976년(경종 1)에 시정전시과에서 등장하고, 이후 몇 차례 개정을 거쳤다. 1076년에 경정한 뒤로는 기록이 없어 전시과의 틀이 이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연구자들은 흔히 무신정권기 이후로 전시과가 붕괴되었다고 이해한다. 그 이유는 무신정권기를 전후로 토지의 침탈과 만성적인 분급 토지의 부족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몽골과의 전쟁을 겪은 다음에는 녹봉마저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자 녹과전이라는 새로운 토지제도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전시과 체제는 붕괴되어 사실상 양반전은 유명무실화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면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 무장 세력과 신진 사류가 사전개혁을 통해서 과전법을 공포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과전 제도를 실시하게 된다. 이로써 고려의 양반전은 조선의 과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양반전은 녹봉과 함께 고려 왕조 관료층의 물적 토대로 기능하였다. 국가는 지배층인 양반 관료에게 수조권을 지급함으로써 피지배층인 양인과 농민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따라서 민전의 주인인 대다수의 농민이 토지소유권을 온전히 발휘하기는 여의치 않았고, 이런 점에서 양반전은 중세 토지 지배 관계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