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중국 당나라에서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하면서 관인 및 농민에게 지급한 토지였다. 균전제 아래에서 농민에게는 영업전 20무(畝)와 구분전 80무 도합 1 경(頃, 100무)이 주어졌으며 이 가운데 영업전은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는 토지였다.
『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전제(田制) 서문에 따르면, "고려의 토지제도는 당제(唐制)를 모방하였다"는 서술로 시작된다. 실제로 영업전이나 구분전이라는 표현이 사료에 보이는데, 이들 토지 지목(地目)이 당나라에서 실시한 균전제와 유사한 것이었는지는 일찍부터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균전제가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고려의 영업전은 당제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영업전이 사료에 처음 보이는 것은 1014년(현종 5)의 일로, 백관의 녹봉이 부족해지자 경군(京軍)의 영업전을 빼앗아 충당하도록 하였다는 기사이다. 이 사건으로 무반과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여기에서 경군의 영업전이란 곧 전시과로 지급된 군인전을 뜻한다. 또한 숙종~인종 대 인물인 이영(李永)이 경군이었던 부친의 영업전을 물려받기 위하여 서리가 되려고 하였다는 자료를 통해서 군인에게 지급된 영업전이 곧 서리가 받는 토지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처럼 서리 및 군인에게 주어진 영업전은 이들이 직역(職役)에 복무하는 대가로 받은 토지였으며, 그것은 직역의 계승과 함께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이른바 전정연립(田丁連立)의 규정에 따라 상속할 수 있는 전시과를 영업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전시과는 군인과 서리 이외에 양반 관료에게도 지급되었고, 오히려 이들에 대한 급전이 중요하였으므로 양반전도 영업전이라고 할 수 있는지 여부가 영업전 이해의 관건이 되었다. 이에 대해 양반전은 군인이나 서리처럼 전정연립이 불가하여 토지를 받은 자가 사망하면 국가에 환수되었으므로 영업전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군인전과 서리전은 직역과 토지가 계승되는 전체토지(傳遞土地)인 것임에 반해 양반전은 납공토지(納公土地)였으므로 영업전이라고 불릴 수 없다고 한다. 대신 5품 이상 고위 관료에게 지급한 공음전시가 바로 양반영업전이었다고 해석한다. 공음전시는 5품 이상 관료에게 지급되었으며 자손에게 상속된다는 점에서 당나라의 관인영업전(官人永業田)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양반전 역시 영업전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양반의 영업전을 공음전시로만 한정하면, 6품 이하 양반에게만 영업전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가 의문으로 남게 된다. 전정연립이 가능한 군인과 서리에게 지급한 전시과만을 영업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양반도 포함시켜야 자연스럽다는 주장이다. 이때 전정(田丁)이란 전시과 규정에 따라 지급된 토지를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전정연립은 양반전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리였다. 따라서 영업전이란 공음전시를 포함하여 전시과 분급토지를 의미하였다고 파악한다.
이밖에 근래에는 공음전시를 제외한 전시과만이 영업전이었다는 견해도 등장하였다. 우선, 공음전시는 5품 이상에게만 지급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당나라의 관인영업전에 관한 다른 사료들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고, 공음전시 규정에 보이는 품은 관품이 아닌 등급이라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두 제도는 모두 형식적으로 5품 이상이 아닌 모든 관료를 대상으로 하였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내용상으로는 당나라의 관인영업전이 직사관(職事官), 훈관(勳官), 작(爵), 산관(散官) 등 관인 일반에게 지급하였다. 이것에 비해, 공음전시는 모든 관료 중에서도 특별한 공로를 세운 이들에게 지급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고려사』 식화지에 공음전시 조항과 별개로 영업전 관련 기록은 전시과 조항에만 배치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고 한다. 관직과 직역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그것이 일정한 조건 아래 자손에게 계승된다는 의미에서 영업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영업전에 대한 연구의 흐름은 대체로 이상에서 서술한 바와 같으며, 현재는 공음전시와 전시과를 포함하여 영업전으로 간주하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영업전은 전시과 및 공음전시로 간주되므로 이들과 마찬가지로 고려 후기에 들어서면 점차 유명무실화되었다고 짐작된다. 국가의 관리 아래 지급되었던 토지는 점차 개인의 사유지화 되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영업전이라는 표현 대신 조업전(祖業田)이라는 용어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영업전은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다는 사유지적 성격으로 인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 우리 역사상 사유지가 부재하였다는 토지국유론적 시각을 탈피할 수 있는 유용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선행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토지사유론은 어느 덧 일반적인 이론이 되었으며, 전시과와 공음전시, 더 나아가 토지 지배의 실체에 대한 본질 해명에 조금 더 접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