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곡(部曲)은 본래 중국에서 호족세력 등에 예속되어 있는 사천민(私賤民)으로서 그 자체가 특정한 신분층을 가리키던 말이었으며, 일본에서도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군현에 준하는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주민은 부곡인(部曲人)이라 하였다.
부곡은 향(鄕)과 함께 행정을 담당하는 기구로서 읍사(邑司)와 담당자인 장리(長吏)가 존재하였다. 부곡리(部曲吏)는 해당 지역의 토착 이족(吏族)으로서 국가의 통제 아래 부곡인을 관리하였다. 부곡과 향의 읍사는 국가로부터 경비를 조달하는 재원으로 공해전(公廨田)을 분급받았으나 그 액수는 일반 군현에 비해 훨씬 적었다. 또한 군현 향리의 책임자를 호장(戶長)이라 한 데 대해 부곡리의 책임자는 장(長)이라 하여 구분하였다. 부곡의 주민은 농업 생산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일반 군현민과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그 신분을 놓고 논란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이른바 향 · 부곡 등 잡소는 다시 갖추어 기록하지 않는다(所謂鄕部曲等雜所不復具錄).”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조에 있는 등신장(登神莊) 항목에는 “신라가 주 · 군 · 현(州郡縣)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縣)이 될 수 없는 것은 향 또는 부곡을 두어 그 소재하는 고을에 속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부곡이 삼국 또는 신라 시기부터 존재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 항목에 열거된 지명을 보면, 향(鄕)은 확인되지만 부곡(部曲)은 나오지 않는다. 향은 『삼국사기』 열전의 공주(公州) 판적향(板積鄕) 사례를 통해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부곡은 그러한 사례가 없어 고려 이전부터 존재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부곡과 부곡인에 대한 기사가 다수 보이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도 부곡의 명칭과 위치 등이 실려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적 조에는 이미 폐지된 부곡이 소개되어 있어 전국적으로 많은 수의 부곡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충청도 · 경상도 · 전라도 등 남부 지역에 전체의 약 88% 정도가 분포하고 있고, 중부 이북 지역에는 부곡의 수가 많지 않다.
한편 부곡과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그 주민의 신분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천인설(賤人說)과 양인설(良人說)이 있다. 천인설은 조선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 1년 8월 조에 “고려 때 5도 양계(兩界)의 역자(驛子), 진척(津尺), 부곡(部曲)의 주민은 태조 때 명을 어긴 자들로서 모두 천한 역(役)을 지게 되었다.”라고 한 것을 주된 근거로 한다. 또한 『고려사』 형법지(刑法志)에서 “군현 주민이 진 · 역 · 부곡인과 교차 결혼하여 낳은 자식은 모두 진 · 역 · 부곡에 소속시킨다.”라는 기사도 부곡의 주민이 일반 군현의 주민과 차별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이에 대해 양인설은 앞서 인용한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신장 항목에서 향과 부곡이 현을 두기에 규모가 부족한 곳에 설치한 행정 단위라는 설명과 고려 후기 부곡의 상황이 일반 군현과 다를 바 없다는 해석에 근거한다. 초기 연구에서는 천인설이 통설이었으나 현재는 양인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주민의 신분과 별개로 부곡이 군현과 차별적으로 운영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부곡 주민들은 국가에 의해 부가적으로 국가 직속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군사 요충지에 동원되어 성을 수축하는 역을 지는 등 특정한 역을 부담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국학(國學)에 입학하거나 승려가 될 수 있는 자격 등에서 법적으로 제한을 받은 점도 차별을 반영한다. 부곡리 역시 관직 진출에서 5품 이상을 초과할 수 없었다. 특히 국학 입학 제한 규정에는 천향부곡(賤鄕部曲)이라는 표현이 보여 뚜렷한 차별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에 비추어 고려 왕조는 후삼국 통합 전쟁 과정에서 왕조에 저항한 지역을 강제적으로 부곡민으로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 통합 후 고려는 이들을 법제적으로 부곡이라는 행정 구획으로 편성하였고, 군현과 구별되는 특수 행정 단위로 운영하였다고 생각된다.
부곡은 고려 후기에 들어 점차 소멸 과정을 밟았다. 일부는 승격을 통해 군현으로 전환되었지만, 대부분은 폐지되어 소재 군현에 합쳐졌다. 『세종실록』 지리지가 편찬된 15세기 전반까지 존속하고 있던 부곡은 68개소였으며, 16세기 전반의 사정을 반영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불과 14개소만 남아 있었다. 이들 역시 이후 모두 폐지되어 부곡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한편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는 반역과 같은 중대 범죄와 관련된 군현을 부곡으로 강등시키는 조치도 있었다. 공민왕 때 원(元)의 사신을 구금한 것을 이유로 전주목(全州牧)을 일시적으로 부곡으로 강등시켰고, 감음현(感陰縣)은 고을 사람이 거짓으로 국왕 저주 사건을 꾸몄다가 발각되면서 부곡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 세조 때에는 고을 수령이 단종 복위를 기도한 순흥부(順興府)를 부곡으로 강등시킨 바 있다.
전술한 『태조실록』의 내용을 참고할 때 부곡은 후삼국의 분열과 통합 전쟁이라는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 이해된다. 그리고 적어도 성립 당시에는 천인 신분은 아니어도 천역(賤役)의 수행에 따른 사회적, 법제적 차별은 존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서 부곡은 고려 국가 성립의 역사성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