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은 전근대사회에 국가의 노동력 수취를 광의로 지칭하는 역사 용어이다. 불특정 민을 징발하는 요역과 특정 인신에게 부과하는 신역 · 직역으로 대별할 수 있다. 고려 전기에 역은 요역 · 직역 · 신역으로 구분되어, 백정호 · 정호 · 잡척층이 부담하였다. 후기에는 역의 동질화, 물납제 · 고립제가 전개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노동력 직접 동원을 원칙으로 요역을 부과하였지만, 16세기 이후 대립 · 고립이 일반화되었다. 17세기 이후 조선 정부는 수포(收布) · 모립(募立)을 공식화하였고, 갑오개혁으로 중세적 역제는 폐지되었다.
기록에 나타나는 역(役)은 광의로는 노동력 전반 즉, 역역(力役)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불특정 민을 징발하는 요역(徭役)과 특정인을 징발하는 신역(身役) · 직역(職役)이 있다.
삼국 · 통일신라 시기에 역(役)의 전반에 대한 것은 알기 어렵고 요역과 군역이 대표적이다. 삼국 초반부터 궁궐 · 성의 건축 등을 위한 노역 동원은 일찍부터 있어서, 23년(온조왕 41)에 백제에서는 15세 이상의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군역은 지배층에게 한정된 특권이어서, 3세기 부여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지배층인 가(加)만 전투에 참가하고, 피지배층인 하호(下戶)들은 식량 공급만 책임졌다. 고대국가 성립 후 국왕의 지휘 아래 전국적인 군대를 편성하였다. 중앙군의 핵심은 백제의 오부병(五部兵)이나, 신라의 육부병(六部兵)처럼 귀족 중심의 명망군(名望軍)과 왕경에 거주하는 평민이었다. 지방군은 촌락 공동체 중심의 성병(城兵)과 일반 농민이 유사시에 군역을 담당하는 형태였다.
군역의 동원 연령은 신라의 경우 18세였고, 부과 대상은 4두품 미만 신분이었다. 신라의 군역 내용은 봉역(烽役), 수역(戍役), 지역을 순찰하는 나역(邏役)이 보이고 있다. 일반민의 복무 기간은 3년 1기였으며, 진평왕 대 설씨녀 부친은 단정(單丁)이지만 수(戍)자리에 동원되고 있었다. 진평왕 대 설씨녀 설화에 의하면 대역(代役)이 가능하였는데, 722년(성덕왕 21)에 정전(丁田)의 지급으로 불가능해진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신라 통일 후 일반민의 군역은 축성, 수리 시설 등과 같은 노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중요한 역사에는 군대 조직을 동원하였는데, 원성왕 연간의 영천 청제(菁堤)를 수리할 때 동원된 법공부(法功夫)나 「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법당(法幢)은 군현 단위로 편성된 노동 부대였다.
신라 정부는 경제적 격차를 참작한 9등호제로 요역 · 군역을 부과하였다. 9등호제의 기준은 토지 기준설, 인정과 토지 결합설, 인정에 소 · 말과 토지의 결합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신라 호등제 구분 기준의 70%가 인정이라는 점 등으로 인신적 색채를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고려 전기에 역제는 다양한 신분이 다양한 형태로 직역 · 신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직역당자는 중앙에서는 관원 · 서리 · 잡류가 있었고, 직역의 대가로 국가는 이들에게 전시과 토지를 지급하였다.
지방의 유력자들인 향리 · 기인 · 군인 등은 일정한 경제력을 가지고 족정 · 반정을 지급받는 정호층에 편제되어 세습적으로 직역을 부담하였다. 정호가 되지 못하는 일반 민호는 직역이 없는 백정(白丁)으로 요역을 담당하는 요역호정(徭役戶丁)으로 불리며 각종 역사에 동원되었다.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잡다한 역은 진 · 역 · 향 · 소 · 부곡 · 장(莊) · 처(處) 등 특수 행정구역의 잡척인의 신역에 의해 조달되었다.
요역의 종류로는 공납과 관련된 공역(貢役), 축성 · 영조의 토목공사 역〔工役〕, 조세 운반의 수역(輸役) 등이 있다. 토목공사 역은 불교 · 도참사상과 관련된 역사가 많았다. 제도적 정비는 986년(성종 5)에 당나라 제도를 도입하여 완비되었다. 당제에 따르면 "부역은 조(租) · 조(調) · 역(役) · 잡요(雜徭) 등의 4종류"라고 하였다. 중앙적인 역은 2159세의 정남이 20일간 복역하거나, 포 · 비단인 ‘용(庸)’으로 납부하였다. 잡요는 지방 관청에서 징발하는 역으로, 1620세의 중남(中男)이 40~50일간 부담하였다.
고려 전기에 요역 운영은 첫째, 정남의 개시 연령이 16세 이상이며, 당 · 신라와 같이 연령 등급의 세분화는 없다. 요역 징발이 인정다과(人丁多寡)로 편제한 ‘호’를 토대로, '6정(丁)=중상호'에서 1정을 내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호등제 시행에 의문을 제시한 견해도 있지만, 조선 성종 이전까지 호별 징수였다. 둘째, 고려의 3세는 ‘조 · 포 · 역’이어서 고려 전기 요역은 노동력 직접 동원이 원칙이었다. 중앙적인 역의 경우에는 역의 물납이 보편적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조선 전기도 물납제가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셋째, 당나라에서의 각종 관청의 사역인, 방수 병사, 역자(驛子), 정장(丁匠) 등은 잡요인 요역 노동이어서 직역 체계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신라에서도 당제처럼 '1계연=중상연(仲上烟)'이 요역 · 직역을 함께 부담하는 체계였다. 고려에서는 당나라의 잡요 종목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직역호의 역이었다.
백정호 가운데 질병이 심하거나, 단정(單丁), 70대 이상의 노인, 질환자를 간호하는 시정(侍丁), 효자 등이 있는 호, 전공(戰功) 본인 · 지역민들은 편호에서 제외되었다. 요역은 본래 양인역이지만 노비 가운데서도 선상입역(選上立役) 중이 아닌 공노비와 외거 사노비는 요역 노동에 징발되었다.
요역 징발에서 사역 기한은 통일신라가 1개월, 조선 세종 때는 20일인데 고려도 20일 정도로 추정된다. 부역(赴役)하는 백정 농민은 식량을 직접 부담하였는데, 특수한 경우나 고용 노동 단계에서는 역량(役糧) 지급 사례가 있다.
고려에서의 직역은 전시과를 지급받는 관리 · 서리 · 한인(閑人) · 중앙군 · 잡류 · 상층 향리, 족 · 반정 계열 토지를 지급받는 지방의 보승 · 정용군 및 일반 향리 · 기인이 담당하였다.
고려 전기 군제는 경군인 2군 6위, 지방의 주현군 · 주진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2군은 국왕의 친위군이며, 6위는 개경의 도성 방비 · 순위(巡衛) · 국경 방수 등이 임무였다.
군인의 신분은 첫째, 군인전을 지급받고 군반씨족 형태로 군역을 세습한다는 ‘군반씨족제설’이 있다. 이 경우 군인은 중간 신분층이 된다. 둘째, 경군의 보승 · 정용은 주현군의 보승 · 정용이 3년마다 상번하여 편성된다는 ‘부병제설’이 있다. 비번 시 보승 · 정용은 군인전을 경작하므로 병농 일치의 농민 신분이 된다. 셋째, 양자의 견해를 절충하여 '2군=직업군'인 '6위=부병 농민'이라는 ‘이원제설’이 있다. 경군에는 전업적 군인층과 번상 입역하는 농민군층이 함께 있었다는 ‘경 · 외군 혼성제설’도 제시되어 있다.
군인 차정의 기준인 군인전의 규모는 ‘족정=17결’, '반정=8결'로 정리된다. 군인전에 포함되는 인정의 수는 차이가 있다. ‘이원제설’에서 '1족 정호=17결+6정'으로 파악하고, 혼성제설에서는 군인과 함께 양호(養戶) · 전호(佃戶) · 족류(族類) 및 인보(隣保)까지 포함시켜 '1족 정호=17결+36정'으로 보고 있다.
군인은 복무 중의 식량 · 의복 · 무기 등을 직접 마련하였고 각종 역역에 동원되는 등 천역시되어 11세기 중엽 무렵부터 군액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12세기 초부터 본인 명의만 본읍에 있으면, 타읍의 내외 족친 소유 토지까지 전정(田丁)으로 인정하는 등 군반씨족 원칙이 흔들렸다.
주현군은 군액에 기재된 보승 · 정용 및 일품군(一品軍)이 있는데, 보승 · 정용은 경제력이 우수한 정호층에서 선발되었다. 군액에 기재 안된 촌류(村留) 2 · 3품군은 촌장의 지휘 체계에 있었다. 1품군과 2 · 3품군은 노동 부대였는데, 2 · 3품군은 1품군보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전군(佃軍) 혹은 양호라는 견해가 있다.
군인 외 직역 담당자로는 이족(吏族)에 속하는 중앙의 서리 · 잡류와 지방의 향리가 있으며, 입사직(入仕職)과 미입사직으로 구분되어 있다. 서리직은 귀가(貴家) 자제들의 음서에 의한 초직(初職)으로, 세습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행정 업무의 실질 담당자인 향리는 상층의 경우 과전 · 녹봉을 지급 받으며 과거를 통해 문무품관으로 승진하였고, 하급 향리는 본래 소유지인 족정계열 토지의 면조권을 지급받으며 향역에 종사하였다.
미입사직인 잡류직은 사령(使令) 임무의 구사(驅史), 관청 수위인 문복(門僕), 형관 군졸인 나장(螺匠), 막사(幕士) 등 다양한 기능직이었다. 말단 이속직인 ‘잡류’는 12세기 이후 ‘잡다한 부류’로 변질된다는 견해도 있고, 전기부터 잡다한 부류로 혼용된다는 견해도 있다.
잡류는 급제해도 7품에 한정되었고, 대부분 잡로(雜路)의 이직에만 종사하여 군인 · 향리보다 신분상 열세였다. 이 때문에 잡류는 중간 계층이 아니라, 향 · 소 · 부곡민 같은 천류라는 견해도 있다. 중앙 관속 공장 가운데 직역층 공장은 별사(別賜) · 무산계(武散階) 전시과를 지급받는 직역 담당자인데, 사로(仕路)가 차단된 신분상의 제약을 받았다.
고려시대 특수 행정구역에 거주하는 부곡제민은 대표적 신역 부담자로, 법적 신분은 양인이지만 백정 농민과 비교하여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였다. 특정 지목의 토지 경작에 동원되는 부곡 · 장 · 처민, 수공업품의 조달을 하는 소민, 진(津) · 역(驛)민은 교통 관련 일을 담당하였다. 소민 외에는 백정 농민의 부담에 신역으로서의 부가적인 역까지 져야 하였다. 천예 신분의 신역 담당자는 공노비가 있다. 급료를 받고 특정 관서에서 근무하는 공역노비나 외거노비의 국유지 경작은 모두 신역에 해당한다.
12세기 전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역제의 변화는 원간섭기에 본격화되었다. 첫째, 고려 전기에 면제 대상자였던 6품 이하 양반 가족, 13세기 초에는 현직 품관까지 요역 부담자가 될 정도로 요역 부담자가 확대되었다. 그 결과 조선 초에는 왕족 · 왕후와 소원한 호의 왕족은 복호(復戶)에서 제외되는 등 위로는 왕족에서 아래로는 노비까지 요역 부담의 보편화로 이어진다.
민의 대거 이탈 현상으로 빈부를 고려하는 자산 과세가 도입되었다. 1291년(충렬왕 17) 이전에 경중에서는 가옥 칸수에 입각한 3등호제가 시행되고, 지방은 1314년(충숙왕 원년)에 토지 기준의 3등호제를 도입하였다.
부역(赴役) 방식에서 군인 · 공장 · 기인 등 직역의 물납 징수가 확산되었다. 고용 노동이 가능한 ‘유수지도(遊手之徒)’의 확대로 양반호에서 거둔 미속(米粟)으로 사람을 고용하거나, 역가(役價)를 받고 공역(貢役)을 면제하거나, 공역(工役)에 ‘고치지도(雇値之徒)’를 활용한 사례가 적지 않다.
고용(雇傭) · 고인(雇人) 등의 용례가 등장하는데, 1338년(충숙왕 복위 6)의 ‘고인’은 조선 후기 고공(雇工)으로 혼용되는 가장 대표적 이칭이므로 고공의 기원이 된다는 견해가 있다. 고려 후기의 고인은 ‘고공’이라는 신분층으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입역을 고수하는 조선 왕조가 건국되었다. 고려 후기 물납제 · 고용노동이 보편화되지 못한 것은 마포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 시간량이 면포의 5배인 점도 제약 요소였다.
12세기 이후 농민 경제의 성장으로 기존 정호층에만 직역을 부과할 필요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전제와 역제의 분리로 전정 연립 기반도 무너져 갔다. 지방의 새로운 별초군은 농민과 아울러 퇴직 관인 · 산직자(散職者), 노군(奴軍) 별초 · 연호군을 비롯하여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모집한 직업 군대였다.
익군(翼軍)에는 군역 제외자인 사노(私奴)까지 포함되는 등 양반층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군역 부담층이 확대되었다. 명맥만 유지하던 정호제는 원종 연간 경기 8현의 반정 혁파를 계기로 소멸되고, 1356년(공민왕 5)에 토지 지급과 관계없는 3가(家) 1호제 원칙이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향리층의 분해 현상으로 사족으로 진출하지 못한 잔류 향리의 직역은 고역이 되어 향리가 없는 군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잡류층의 말단 이속직과 구사 · 나장같은 사령직(使令職) 등에 일반민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부곡제 지역의 잡척층이 양인으로 편입되면서, 잡척층의 다양한 신역은 일반 군현민의 부담으로 전환되었다. 소의 공납인 금 · 은 채굴에 군현민을 동원하거나, 비단 등의 공물이 군현에 부가됨으로써 ‘공물을 부담하는 공호(貢戶)’가 일반민의 또 다른 표현이 되었다. 잡척이 지던 신역 일부는 간척층(干尺層)이 담당하는 잡색역이 되었으며, 이들은 조선 초 신량역천(身良役賤)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역제는 '신역=직역'이 동일 개념으로 요역까지 포괄하지만, 요역은 일반민의 대표적 직역이므로 구분할 수도 있다.
조선에서 요역은 호를 구성하는 모든 인정에 부과되는 ‘호역(戶役)’이었다. 출정(出丁) 기준은 태조 대 인정다소의 계정법(計丁法), 정종 원년의 계정 · 계전의 절충법, 세종 때인 1435년(세종 17) 경중의 가옥 칸수 · 지방의 계전법을 거쳐 성종 초에 ‘8결출1부(八結出一夫), 1년 6일’로 개정되어 ‘역민식'에 조문화되었다.
연군(烟軍)을 ‘전결지군(田結之軍)’으로 부르는 것은 부과 기준이 전결이기 때문인데, 전결 부과는 국가 주도의 요역에 한하고 지방 관부 주도의 요역은 호역으로써 계정 · 계전의 절충으로 부과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또 역민식은 국가 주도의 역에만 해당하고, 지방 관부의 역에는 법규정이 없다는 견해도 있다.
1464년(세조 10)에 보법의 시행으로 모든 인정이 군역 부담자가 됨으로써, 일반민은 군역 · 요역의 2중 부담자가 되었다. 이로써 군역 · 요역의 구분이 모호해져, 성종 이후 번상 · 입번하는 군사가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등 군역의 요역화가 촉진되었다. 조선 전기 3대 역부는 연군, 군인과 함께 역승(役僧)의 징발인 것은 억불숭유 국가로서의 특징이었다.
군역은 관료 · 향리 등 직역자, 교생(校生) 등 면역자, 공사천의 사역(私役) 부담자를 제외한 양반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분이 부담하는 신역으로서의 국역(國役)이었다. 공경 자제의 군역은 일반 백성과 다른 충순위(忠順衛) 등과 특수 병종이었다.
조선 초 양인의 군역은 3정 1호(三丁一戶)의 원칙으로 1명의 입역 군사와 2명의 봉족으로 구성되었다. 봉족제는 인정의 비균질성이 내재되어 군역의 평준화와 군액의 증가를 목적으로 하는 보법으로 개편되었다. 최초의 보법은 2정 1보에 토지 5결 · 사노까지 포함되었지만, 권세가의 반대로 2정 1보만 법제화되었다.
보법에서 군역 대상자였던 양반이 이탈하자 군역의 양인 개병제 원칙은 무너지고, 16세기 이후 군역은 일반 양민이 부담하는 ‘ 양역(良役)’이 되었다. 선조 연간에 지방에는 공사(公私) 천인을 포괄하는 속오군이 조직되면서 또 한차례 '군역=양역'이라는 원칙이 변경되었다.
군인의 병종은 군무와 노역을 겸하는 정군(正軍) · 선군(船軍), 방패(防牌) 등과 같이 노역만 전담하는 역군(役軍)이 있었다. 정군은 본거지에서의 농업 활동을 위하여 번상 대신 사람을 사서 대립(代立)시키는 일이 잦았다. 보병의 대립을 막을 수 없게 된 정부는 전문성이 약한 보병부터 포의 징수를 공식화하였다. 1541년(중종 36)의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은 군적에 실린 보병의 군액만큼 미리 포를 징수하는 제도로, 보병의 군역은 물납세 징수로 변경되었다.
직역 담당자로는 녹사(錄事) · 서리(書吏)의 동반 경아전(京衙前), 제원(諸員) · 조예(皂隷) · 나장의 서반 경아전이 있다. 지방에는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와 군사 실무를 맡는 군교(軍校)가 있었다.
조선 초 녹사 · 서리는 문서 업무인 도필의 업무〔刀筆之任〕를 담당하였고, 상급 서리인 녹사는 체아직(遞兒職)을 받는 동안은 녹봉이 지급되고 품관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경찰 업무와 유사한 직무를 맡았던 서리는 세종 연간의 체아직이 혁파되면서 역을 기피하게 되었다. 서반 경아전의 직역은 관아 · 관원의 명령 아래에 각종 잡역(雜役)에 부림당하는 사령(使令) 일과 사법 · 형사 관련 등 임무를 담당하였다.
제원은 상급 아전, 조예 · 나장은 하급 아전으로 복무 기간 중 1명 지급되던 보인도 중기 이후 중지되었다. 서울 주변을 제외한 지방의 조예 · 나장에게 연 20필의 납부로 번상을 대립하게 하였지만, 너무 고가인 탓에 조예 · 나장의 피역 저항이 계속되었다.
향리층은 녹봉의 미지급은 물론 1445년(세종 27)에는 외역전(外役田) 지급까지 중지되었고, 시탄 공급 및 잡역에 동원되거나 북계 향리는 관군역 · 목자역까지 부담하는 등 위상이 낮아지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이후 사족층의 배타적 특권 강화로 서리층은 중인층 신분으로 고착되었다.
고려 이래로 잡척층의 신역 담당자인 칭간칭척자(稱干稱尺者)들은 보충군 입속 후 양인 신분이 되었고, 세종 이후에는 신량역천이라는 용어도 사료에서 사라진다. 진척 · 염간을 제외한 칭간자는 신분적 차별이 드러나지 않도록 호칭을 바꾸고 잡색역을 부담하였으며, 사족층을 제외한 조예 · 나장 · 군사 · 아전 · 서얼 · 향리 · 천예 등 다양한 대상과 함께 잡류로 규정되었다.
노비 신분의 신역은 35만여 명에 이르는 공천만 직역의 대상이었다. 공노비는 노역을 담당하는 선상노비(選上奴婢)와 현물 납부의 납공노비(納貢奴婢)가 있었다. 공노비는 시노비(寺奴婢) · 관노비(官奴婢) 등으로 소속된 관청에 따라 직역을 부담하였다.
25만여 명의 시노비는 중앙 각사에 소속되어 입역 · 신공을 부담하였으며, 관노비는 군현 · 진영(鎭營) 등 지방 관아에서 직역을 담당하였다. 납공노비는 노(奴)는 면포 2필 · 비는 1필 반의 신공 의무를 지었는데, 공노비 중 부유한 자는 고가의 선상 대립가(選上代立價)를 치르고 입역을 면제 받았다. 공노비의 선상 · 입역제는 16세기 이래 양역과 마찬가지로 대립 · 납포제가 널리 시행되었다.
요역 종목 가운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던 공물 관련 노동은 대동법의 시행으로 물납화되는 획기적 변화를 맞았다. 노동력 징발에 의존하였던 토목공사 요역에서도 연호군의 피역 · 대립이 이어지자 정부에서는 역부를 모집하는 모립(募立)으로 전환하였다. 선조 연간에 종묘 · 궁궐의 중건 공사를 위하여 모집한 역부의 급료를 위해 각 도의 전결에서 포를 징수하였다.
고용을 직업으로 하는 고공의 수적 증가로 1680년(숙종 6)에는 고공의 범주를 설정하였다. 정조 대에는 ‘10냥 이상 고용가 · 5년 이상의 고용 기간 그리고 문권이 있는 자’로 신분을 규정한 고공정제(雇工定制)를 마련하였다.
연군 · 군인과 더불어 역부의 3대 축인 승군은 산릉역(山陵役) · 축성역 등에 장기간 사역되었다. 승군의 부역 동원은 연군 · 군인보다 오랫동안 실역 부담이었는데, 영조 연간 산성 등에 교대로 번상하는 의승의 대립가인 의승방번전(義僧防番錢)을 징수하여 고용 노동으로 대체하였다.
모립제로 운영되던 토목공사 역은 18세기 중엽 이후 대부분 모군이 전담하는 형태로 바뀌면서, 이후의 요역은 잡다한 연호(烟戶) 잡역의 한 형태로서만 부과되었다. 18세기까지 있었던 일부 부역 노동은 갑오개혁의 ‘회계법’ 총칙 제1조에서 "요역 및 기타 역역(力役)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조세법 정주의 규정이 발포됨으로써 완전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16세기부터 전개된 수포제 · 고립제는 17세기 이후 더욱 확산되었다. 고된 군역으로 병력 확보가 어렵던 수군에서도 1654년(효종 6)에 전면적으로 고립이 시행되었다. 급료병으로 유지되는 훈련도감이 상설 군영으로 정착될 수 있었던 배경은 군역에서의 수포제 · 고립제로의 전환이었다.
임진왜란 중 조직되었던 양 · 천 혼성군인 지방의 속오군에서도 수미수포법(收米收布法)이 적용되었고, 영조 중엽부터 양인은 제외되어 천예군으로 남게 되었다. 지방 군역에서 양역의 수포군과 천예군의 이원적인 존재는 ‘군역=양인역’이라는 경계가 무너짐을 의미하였다.
군 · 현 단위의 납부 책임이 강화된 군총제(軍摠制) 아래에서 피역 인구가 확산되자, 족징(族徵) · 인징(隣徵) 등과 같은 양역의 폐단이 발생하였다. 양역제의 개선을 위하여 1750년(영조 26)에 2필의 군포를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하고, 감액된 군포는 1결당 쌀 2말을 내는 결작미(結作米) 등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균역법으로 양역 부담의 일부가 경감되고, 부분적이나마 인정세가 토지세로 전환된 것은 의의가 있지만, 결작미가 종국에는 농민의 부담이 되는 한계가 있었다. 120여 년 후 고종 연간인 1871년 흥선대원군이 시행한, 모든 호에서 포를 징수하는 ‘호포법’은 양반도 군역을 부담하게 된 획기적인 조치였다. 호포법에서 다소 남아 있던 양반호 · 평민호의 차별은 갑오개혁의 결호세제도(結戶稅制度)에 의한 일률적인 화폐납의 징수로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졌다.
하급 실무 담당자의 직역도 16세기 군적 수포제의 시행과 요역 노동의 고립제 추세로 임노동화되기 시작하였다. 1593년(선조 26)에 서리의 요포(料布) 규정을 시작으로, 인조 연간에는 1결당 4두를 징수한 대금으로 조예 · 나장을 고용하였다. 아전층의 직역도 부역제 대신 급료를 지급하는 고용 노동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1781년(정조 5)에는 "궐내 각처 고립군은 모두 동서 곳곳에서 왔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궐내 모든 잡무를 담당하는 내시부(內侍府) 등을 비롯하여 궐내외 관청에서 직역의 임노동화가 일반화되었다.
장인등록제를 토대로 운영되던 관청 수공업에서도 장인의 등록 기피로 사장(私匠)을 고용하는 고립으로 바뀌었다. 천신분의 직역은 영조 말년에 신공(身貢) 노비의 노(奴)만 포 1필을 바치게 함으로써 천역과 양역이 균질화되었다. 외거노비의 선상 · 입역제는 인조 전후로 고립되다가 17세기에는 전면 폐지되었다. 1801년(순조 1)에 6만 6000명에 달하는 내노비 · 시노비가 해방되고, 나머지 공노비와 사노비는 갑오개혁에서 해방되어 완전히 노비의 신역도 폐지되었다.
역은 전근대국가의 유지 · 운영을 위하여 각종 인적 자원을 동원 · 징발하는 세목으로 신분제와 지배 예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고대국가에 근접할수록 토지의 낮은 생산성으로 인해 노동력 의존도가 높은 인신적 수취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역제 진전의 1단계는 인신적 징발에서 빈부 격차의 균형성을 담보하는 자산 과세로의 전환이다. 2단계는 노동력 징발에서의 입역 · 대립에 대한 자율적 선택권 획득, 최종적으로는 무상 노동력의 폐지였다. 때문에 역제 변천은 국가 권력에 의한 부당한 노동력의 강제, 권력층 · 부호층과의 차별성을 지양하는 신분 해방의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