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이속직(吏屬職)의 말단에는 잡역에 종사하는 잡류(雜類)가 있었다. 잡류로 지칭된 이속은 문복(門僕) · 주선(注膳) · 막사(幕士) · 소유(所由) · 장수(杖首) · 나장(螺匠) · 구사(驅史) · 전리(電吏) 등이었다. 잡류는 소속처에 따라 다양한 잡무를 나누어 담당하였다.
문복은 출입문을 지키는 수위(守衛)를 담당하는 잡류로서, 여러 관청에 소속되었는데, 중서문하성에는 1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주선이 맡은 업무는 기록이 없어 분명하지 않다. 다만 당(唐)나라의 경우 다른 이속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은 인원이 상식국(尙食局)에 배치된 것으로 보아 고려에서도 상식국에서 주식(主食)의 지휘를 받아 식사 준비를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막사는 수궁서(守宮署)에 50명, 공역서(供驛署)에 40명, 상사국(尙舍局)에 40명씩 배치되어 있었는데, 궁궐에서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거나 관리하는 공어(供御)와 여러 가지 설비를 담당하는 장설(張設) 등의 잡다한 일을 수행하였다. 소유는 어사대에 50명, 장수는 형조에 26명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나장과 마찬가지로 죄인을 체포하거나 연행하고 심문하는 과정에서 형관(刑官)의 보조 역할을 하였다.
구사(驅史)는 구사(驅使)로도 쓰이는데 주로 관리들을 호종(扈從)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구사는 관료들의 품계에 따라 차등 분배되었기 때문에 지급된 구사의 수는 해당 문무반 관직자의 지위를 가늠하는 지표가 되었다. 전리는 중서문하성의 이속으로 180명에 달하였는데, 여러 관청과 연락을 담당하는 사령(使令)의 직무를 맡았다.
한편 잡류는 소속처에 따라 관속잡로직(官屬雜路職)과 관급잡로직(官給雜路職)으로 구분하였다. 관속잡로직은 여러 관서에 소속되어 사령이나 형관 보조(刑官補助) · 식찬(食饌) · 재봉(裁縫) · 의료(醫療) · 진설(陳設) · 수문(守門)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관급잡로직은 관료들에게 품계의 높낮이에 따라 차이를 두어 지급되었으며, 각종 심부름이나 호종의 임무를 맡았다.
잡류는 이속직 중에서도 지위가 가장 낮았기 때문에 벼슬에 오르거나 승진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다. 고려시대의 이속직에는 주사(主事) · 녹사(錄事) 등의 입사직과 장고(掌固) 등의 미입사직이 있었다. 그런데 일반 서리는 품관까지 사로(仕路)가 연결되어 유품(流品)으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잡류는 품관과 단절되어 있어 입사직 서리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잡류의 입사로(入仕路)는 잡로(雜路)라고 하여 정통의 입사로인 정로(正路)와 구분되었다. 따라서 잡류가 벼슬하는 사로인 잡로는 품관 사로와 인접하여 있으면서도 품관선을 상한으로 단절된 이직사로(吏職仕路)였다.
잡류의 차등적 지위는 여러 가지 법제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잡류는 벼슬할 수 있는 권리인 사환권(仕宦權)과 과거 응시자격인 부거권(赴擧權) 등에서도 제약을 받았다. 본래 잡류는 부거권이 박탈된 계층이었다. 1045년(정종 11)의 규정에 따르면, 향 · 부곡 · 악공 · 잡류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잡류의 자손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이 봉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규정과는 달리 잡류의 자손이 과거에 응시한 사례가 있다. 1058년(문종 12)에 잡류에 해당하는 당인(堂引) 강상귀의 증손인 강사후가 제술과(製述科)에 응시하여 낙방하였다. 고려에서는 과거시험에 10번 낙방하는 십거부중(十擧不中)에 해당하면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해주는 탈마(脫麻)의 혜택을 주었는데, 강사후가 여기에 해당되면서 논란이 발생하였다.
일부 관료는 십거부중례(十擧不中例)에 따라 탈마시키자고 하였지만, 이와는 반대로 탈마를 허용하지 말자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규정상 잡로인(雜路人)의 자손은 부(父) · 조(祖)의 벼슬길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강사후의 탈마는 부당하다고 하였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지만 국왕 문종이 탈마를 허락하지 말라는 관료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강사후가 이미 10번이나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잡류의 자손에게 부거권을 박탈한 규정과는 달리 실제로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인데, 이것은 금령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과거 응시를 묵인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에도 잡류의 벼슬길에 대한 규제가 계속되었다. 1096년(숙종 1)의 판문(判文)에서 주선 · 막사 · 소유(所有) · 문복 · 전리 · 장수 등의 잡류는 비록 고조(高祖) 이상의 조상이 삼한공신(三韓功臣)이라도 정로남반(正路南班)만을 허용하였다.
정로에 대해서는 ‘정통의 사로’ 혹은 과거로 출신(出身)할 수 있는 정(正) 코스로 보기도 하고, 혹은 서리직의 사로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무정잡(文武正雜)’, ‘문무양반남반잡로(文武兩班南班雜路)’의 용례를 보면 정로와 잡로는 남반정로와 잡로로 파악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숙종의 이 판문은 삼한공신의 후손인 잡류에게 남반에 한하여 입사를 허용한 것이다. 고려에서 남반은 7품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삼한공신의 후손인 잡류는 정7품 내전숭반(內殿崇班)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던 셈이다.
잡류의 벼슬 문제는 이처럼 우여곡절을 거치다가 마침내 1125년(인종 3)에 이르러 군인 자손을 허통한 예에 근거하여 잡류의 자손에게도 과거 응시가 허용되었다. 잡류 자손의 과거 응시자 중에서 제술과나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한 사람은 5품까지, 의업(醫業) · 복업(卜業) · 지리업(地理業) · 율업(律業) · 산업(筭業)에 합격한 사람은 7품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처럼 잡류 자손에게 과거 응시를 허용하면서도 특정한 품계까지만 올라갈 수 있도록 한품(限品)의 제약을 두었다는 사실에서 잡류에 대한 신분적 차별을 엿볼 수 있다.
잡류의 자손은 국자감에 입학할 자격이 부여되지 않았다. 인종 때에 정해진 학식(學式)에 따르면, 잡로는 공(工) · 상(商) · 악(樂) 등에 이름이 오른 천사자(賤事者)와 더불어 국자감에 입학할 수 없었다. 고려에서 과거는 음서와 더불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그리고 고려에서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에서 학업을 수행한다는 것은 과거 응시를 위한 중요한 선행 단계였다.
따라서 잡류가 국자감의 입학 무자격자였다는 점은 이들의 벼슬길 진출이 법제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제약은 본래 잡로인의 자손은 부 · 조 · 증조의 사로를 따르도록 한 규정과도 관련이 있다. 비록 잡류 자손에 대한 과거 응시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지만, 잡류에게 법제적으로 완전하게 사환권(仕宦權)이 부여되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잡류는 말단 이속직으로 여러 가지 신분적인 제약이 있었지만, 국가로부터 전시과를 받는 이족(吏族)이었다. 1076년(문종 30)의 전시과에서 잡로직(雜路職)은 제15과부터 제18과에 포함되어 있었다. 제15과에는 전구관(殿驅官), 제16과에는 당인(堂引) · 당직(堂直) · 감선(監膳) · 전식(典食) · 전설(典設), 제17과에는 주약(注藥) · 약동(藥童) · 공선(供膳) · 주식(酒食) · 공설(供設) · 장설(掌設) · 당종(堂從)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가장 낮은 등급인 제18과에 토지 17결을 받는 잡류가 별도로 있었다. 제15과 · 제16과 · 제17과에도 잡로직이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18과도 잡류가 있었다는 것에서 잡로직이 점점 분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려의 잡류는 전리 · 구사 · 문복 · 소유 등 말단 이속직을 지칭하지만, 때에 따라 더 많은 대상이 잡류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군인잡류(軍人雜類) · 군민공상잡류(軍民工商雜類)처럼 잡류는 잡다한 부류를 관용적으로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고려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변화가 두드러지면서 더욱 다양한 계층이 잡류에 포함되었다.
예를 들면, 노복잡류(奴僕雜類) · 복종잡류(僕從雜類) · 공상잡류(工商雜類) · 상고잡류(商賈雜類) · 승속잡류(僧俗雜類) 등으로 표현되었다. 노복잡류와 복종잡류는 관원들이 데리고 다니는 다양한 성격의 노복, 종자들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예전 잡류직에 근원을 두고 있는 구사(驅史) · 전리(典吏) 외에도 반당(伴倘) 등과 같은 다양한 성격의 사령과 종자들, 그리고 천례(賤隸)까지도 포함되었다.
시일이 흐르면서 잡류직의 대물림에도 변화가 생겼다. 고려 중기 이후 잡류의 자손에게 과거 응시를 허용하는 등 잡류에 대한 사로 제한이 일부분 해제되면서, 잡류의 후손이라도 잡류의 직역을 물려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이르러 전시과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관리들에 대한 경제적 대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는데, 관료 조직의 가장 아래에 있는 잡류들의 처지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따라서 잡류직에 대한 경제적 대우를 보장할 수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잡류직의 대물림을 강제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점점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잡류의 지위에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잡류는 본래 미입사직이었지만 고려 후기에 이르면 품관으로 진출하는 잡류가 출현하였다. 전리나 구사 중에서 왕실이나 권신(權臣) 등 권력가의 도움으로 초입사(初入仕)를 허락받아 품관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무신집정인 최항의 구사 20명은 국왕 고종으로부터 진배파령(眞拜把領), 또 다른 20명은 초입사를 허락받았다.
원종 때에도 무신집정인 김준의 구사 중에서 10명은 초입사, 10명은 진배파령의 특혜를 받았다. 이때 구사에게 허락된 초입사직은 실직(實職)이 아닌 산직(散職) 대정(隊正)이고, 진배파령은 초입사보다 상위의 혜택으로서 산직이 아닌 진직(眞職) 대정으로 추정된다. 일반 서리와는 달리 잡류는 입사직 서리까지만 승진할 수 있고 유품(流品)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매우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려 후기에 잡류는 군대에 편제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잡류별초(雜類別抄)는 고려와 몽골의 전쟁 기간에 충주성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고려의 지방 군대인 주현군은 양반 · 한인 · 잡류로 편성되었는데, 주현군의 잡류는 그 지역의 서리(胥吏)라기보다는 양반도 한인도 아닌 다양한 부류로 추정된다.
잡류 구성원의 다양화 추세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세종 대의 기록에 따르면 공상(工商) · 천례 · 조례(皂隸) · 소유 · 나장 · 장수나 향리 · 관노(官奴) · 역자(驛子) · 공사천례(公私賤隸) · 제색공장(諸色工匠) · 진척(津尺) · 염간(鹽干) 등이 특별한 역(役)이 있는 잡류, 즉 유역잡류(有役雜類)로 지칭되었다.
1430년(세종 12)에는 잡류와 잡직(雜職)에 대한 처리 방안이 논의되었는데, 잡류의 법제적 지위를 규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논의에서는 중국과는 달리 조선의 관제에 잡류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공상 · 천례 · 조례 · 소유 · 나장 · 장수의 무리라도 직임을 얻어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는 폐단이 지적되었다. 이에 따라 잡류가 유품에 섞이는 폐단을 막기 위해 별도로 잡직을 마련하였다.
잡류 계층의 다양성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잘 드러난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잡류에게 수릉군(守陵軍) · 수묘군(守墓軍) · 간수군(看守軍) · 단직(壇直) · 당직의 직임을 맡게 하였다. 그리고 진부(津夫) · 수부(水夫) · 빙부(氷夫) · 약부(藥夫) · 어부(漁夫)도 잡류였다. 이밖에 녹사 · 서리 · 화원(畫員) · 도류(道流) · 각읍인리(各邑人吏) · 일수(日守) · 의생(醫生) · 장인(匠人) · 공사천(公私賤) 등도 잡류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잡류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것도 있지만, 고려 말의 다양한 신량역천자(身良役賤者)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잡류층으로 정비되어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인재관자(庶人在官者)도 잡류와 관련된다. 고려 전기 서인재관자의 사례는 관리 휴가 규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친자(親子)가 없는 조부모의 기일(忌日)인 경우에 벼슬에 오른 문무관에게는 모두 하루 낮과 이틀 밤의 휴가를 주었지만, 서인은 휴가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런데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고려의 서인재관자로 주사(主史) · 영사(令史) 등의 서리직과 전리 · 문복 · 장수 · 막사 등을 지적하면서 이들을 소리(小吏)로 지칭하였다. 따라서 서인재관자에 잡류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조선의 서인재관자는 액예(掖隸) · 이서(吏胥) · 군오(軍伍)의 세 부류이고 대상도 훨씬 많아서 고려와는 차이가 컸다.
잡류는 문무 양반이나 서리와 함께 관직 체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이들과는 구별되는 말단 서리직이었다. 잡로인은 관료 기구 안에서 이속직을 맡으면서도 잡로를 벗어날 수 없는 신분적 한계가 뚜렷한 계층이었다. 게다가 원칙적으로 잡다한 이직(吏職)만을 대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관인층에 비해 지위가 매우 낮았다. 때때로 역민(逆民)의 후예나 악공(樂工)의 자손이 잡류에 편입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잡류직에는 대체로 사회적 신분이 낮거나 가계(家系)에 흠이 있는 사람들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잡류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일부 잡류는 과거에 급제하거나 군대에서 공을 세워 품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려 말에 공사노예(公私奴隸) · 향리(鄕吏) · 역자 · 공상 · 잡류로서 관직을 받은 자는 관품을 따지지 말고 작첩(爵牒)을 회수하도록 조처하였는데, 이는 잡로인의 품관 진출에 대한 장벽을 무너뜨리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잡류는 말단 서리직이라는 특정한 대상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잡다한 부류를 관용적으로 총칭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 후기부터 잡류에 해당하는 대상이 많아졌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다양한 부류가 『경국대전』에 잡류로 규정되었다.
이는 잡류가 어떤 특정한 자격이나 표준에서 벗어나거나 포함될 수 없는 잡다한 계층을 포괄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잡류는 시기에 따라 포함되는 대상이 달라지고, 잡류 구성원마다 독특한 신역(身役)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적 동질성을 가진 계층으로 보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잡류는 시간이 흐를수록 포함되는 대상이나 계층이 확대되어 서얼이나 향리, 때로는 잡과 출신 급제자도 잡류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사족과 사족이 아닌 자를 구분하려는 배타적 의식에서도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잡류의 의미와 범주는 시기적인 차별성이 크므로, 잡류의 신분적 지위를 획일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