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은 조선 시대 예조 산하 관청인 도화서에서 그림 그리는 일에 종사한 잡직의 화가이다. 조선 시대에 회화 미술은 도화서 화원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도화서의 화원 정원은 20명, 30명 등으로 시대에 따라 변천이 있었다. 이들 화원에게 주어진 보직은 선화·선회·화사·회사 등 4품직에 5인이었다. 화원들이 가장 많이 그려야 했던 것은 의례·제례·의장 등의 의궤화였다. 그 외에 어진 제작, 왕족 및 공신·사대부들의 초상화, 모형도, 실측도 등도 그렸다. 우리나라 회화가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한 것은 이들 화원의 활동에 힘입었다.
일반적으로는 왕실 직속의 어용화가(御用畫家) 또는 그림 일을 맡아보던 관청, 즉 화원에 봉직하는 직업 화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특히 조선시대의 도화서에 소속한 그림 그리는 사람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회화 미술은 도화서의 화원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⑴ 직 제
『경국대전』에 따르면 도화서에 소속한 화원의 정원은 20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1785년(정조 9년)의 『대전통편』을 보면, 도화서 직제의 일부가 개편되었을 때는 그 정원이 30인으로 증원되고 있다. 도화서 설치 이래로 시대에 따라 도화서 직제에 여러 번의 변천이 있었다.
하지만 화원에게 주어진 보직(補職)은 『경국대전』 이후 변함없이 오직 네 품직(品職)에 5인뿐이었다. 즉 종6품직인 선화(善畫)로부터 종7품직의 선회(善繪), 종8품직의 화사(畵史), 종9품직의 회사(繪史) 등 네 자리뿐으로서 그 중 회사만이 2인이고 다른 품직은 각 1인씩이었다.
다시 말해서 수십 명의 화원에 대하여 보직을 받을 수 있는 인원이 5명뿐이었다. 화원의 보직이 비록 네 자리에 5명밖에 안 되고 종품(從品)으로서 격이 낮은 잡직이기는 하나 화원으로서 녹봉(祿俸)을 지급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므로 화원의 신분으로서 관직에 오를 수 있고 출세도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리였다.
이 밖에 임기가 만료되어 보직에서 물러나더라도 녹봉을 받으며 계속 일할 수 있는 자리로서 종6품 · 종7품 · 종8품의 서반 체아직(西班遞兒職)이 배려되고 있었다. 나라에서는 그림 그릴 일은 매우 많아서 항상 일손이 부족하였음을 걱정하였던 것 같다.
게다가 그림 배우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10년 가까이 익혀야만 겨우 화원으로서의 공(功)이 나타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화원이 되고자 하는 자를 미리 도화서에 입속(入屬)시켜서 그림을 전습(專習)하도록 하는 화학생도(畫學生徒)를 두었다.
그 인원이 『경국대전』에서는 15인이었는데, 1746년(영조 22년)의 『속대전』 이후에는 30인으로 증가하였다. 도화서의 할 일은 많았고, 그래서 재능 있는 화원을 보충, 확보하려 하였던 의도가 엿보인다. 화원을 지망하는 자에게는 중인 계층 이하에서 기능직을 선발하는 잡과의 취재제도(取才制度)를 통하여 시험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기성 화원의 진급도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으로 결정하였다. 이 취재에 들지 못하면 도화서의 화원으로서 아무리 수십 년을 그림 그리는 일에 전력하였어도 한자리를 받지 못하였다. 시험 과목은 죽 · 산수 · 인물 · 영모(翎毛) · 화초 등 다섯 가지 그림이었다.
응시자에게는 이 가운데에 두 가지를 선택하여 그리도록 하되 이것을 4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죽 · 산수에 대한 배점이 높았다. 높은 과목을 선택하여 시험에 응하는 것이 유리하였음은 물론이다. 이 시재 방식은 죽 · 산수를 잘 그리는 화원을 선발하거나 우대하려는 시험 방법이었다.
여기에는 당시의 사대부 등이 절개를 상징하는 죽을 사군자의 으뜸으로 여기고, 산수를 중심으로 하는 시서화(詩書畫) 일치의 격조 높은 문인화풍 숭상의 유교적 정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조선 왕조 지배층의 일반적인 회화관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원 지망자나, 화원으로서 수록(受祿)의 기회를 얻으려는 자 또는 진급하려는 자 모두가 이러한 시험의 취지에 적응하여 열심히 그림을 공부하고 익혔다고 본다.
⑵ 직 무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도화서의 화원들이 실제로 맡아서 그려낸 일들은, 감계화(鑑戒畵) · 교민화(敎民畵) · 장식화(裝飾畵) · 사대의례도(事大儀禮圖) · 제례도(祭禮圖) · 의장도(儀仗圖) · 세화(歲畵) · 경직도(耕織圖) · 지도(地圖) · 불화(佛畫) · 포응견본도(捕鷹見本圖) · 초상화(肖像畵) · 지형실경도(地形實景圖) · 실경산수사생도(實景山水寫生圖) · 감상화(鑑賞畵) · 모사(摹寫) · 사생(寫生) 등이다.
이중에서 화원들이 가장 많이 그려야 하였던 것이 의례 · 제례 · 의장 등을 그린 의궤(儀軌)화였다. 조선 왕조는 유교를 정치 원리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규모의 모든 행사나 왕실의 의식이 이 유교 예제(禮制)에 의하여 치러졌다.
그리하여 거기에 필요한 수많은 사항이 기록과 함께 도보(圖譜)로써 설명된 각종 의궤들이 만들어지고 존안(存案)되었다. 도화서가 예조 아래 두어진 연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가장 정밀하게, 빈틈없이 힘들여 제작하였던 그림은 국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이었다.
어진 제작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었던 만큼 1급 화원 출신에서 주로 선발하였으나 간혹 방외화사(方外畫史)라고 하여 화원 이외에서 선발하기도 했다. 그것은 화원으로서 최상의 영광이었고 잘 그리면 크게 출세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으며 큰 상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화원들은 왕족 및 공신 · 사대부들의 초상화도 그렸는데 조선시대의 초상화 성행과 발달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경지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병사(兵事) · 농업 · 의학 · 건축 · 지리 · 천문 등 실용에 관련되는 서적과 삼강오륜의 실례를 담은 각종 교화서(敎化書)에 도설(圖說) · 삽화 · 모형도 · 실측도 등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는 도자기 제작소에 파견되어 각종 도자기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수장(收藏)된 중국의 그림을 묘사하고, 많은 양이 필요한 같은 그림을 수없이 베껴내는 일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도화서의 화원은 그리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다 그렸다.
이렇듯 많은 수요를 충족시켜 나가는 동안에 예술이라기보다는 자칫 동일한 기술의 반복으로 그치기 쉬운 것이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그림의 숙련은 화성(畫性)을 지닌 화원으로 하여금 화원화(畫院畫)에 정진하게 하여 왕실 · 사대부의 높은 안목을 만족시키는 품격 높은 화원을 배출하였다.
화원 중에는 동지사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 좋은 그림을 보고 우리의 그림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서 일본 회화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화격(畫格)이 뛰어난 화원은 도화서의 교수를 배임(配任)받아 그림 그리는 일을 지도 내지는 관장하였다.
그리고 솜씨가 정묘하여 어용을 뛰어나게 그린 화원 중에는 도화서의 정직(正職)인 별제(別提) 또는 그 이상의 후대를 받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와 후기에 가면 가계적(家系的)으로 서로 관계를 가지는 화원 집안이 나타난다. 그래서 대체로 몇 개의 화원 가문이 도화서를 거의 독점하여 화단을 주름 잡는 인상을 주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의 회화가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항상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해 온 것은 실로 이들 도화서의 화원이 펼쳐 보인 미술 활동에 크게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