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공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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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개념
기계 및 이에 관련되는 장치설비의 설계 · 제작 · 운전 등에 대하여 기초 및 응용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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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기계 및 이에 관련되는 장치설비의 설계 · 제작 · 운전 등에 대하여 기초 및 응용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
내용

여기서 기계라 함은 저항력을 가진 다수의 부품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그 각 부분 사이에 일정한 관계운동을 가짐으로써 유용한 일을 하는 동적 장치를 말한다.

기계는 어떠한 목적의 일을 하는 작업기계(일반 기계·공작기계·화학기계·농업기계·운반기계 등)와 연료 등으로부터 동력을 발생시키는 원동기(내연기관·증기기관·터빈 등) 및 원동기로부터 작업기계로 동력을 전달하는 전동장치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제어장치를 별도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기계공학의 내용 가운데 기초적인 것으로는 열역학·유체역학·재료역학·재료학·기계역학·기구학·기계설계법·기계제작법 등이 있고, 응용적인 것으로는 내연기관학·증기동력학·유체기계학·공작기계학·측정법·교통기계학·산업기계학 등이 포함된다.

이상은 전통적으로 기계공학의 각 분과로 확립된 것들의 일부이며, 이 밖에도 새로운 분야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조선공학·항공공학도 넓은 뜻의 기계공학에 포함되는 경우가 있으나 오늘날 이들은 기계공학과 별도의 공학 분야로 취급되는 것이 보통이다.

기계공학의 역사는 18세기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된 와트(Watt,J.)의 실용적 증기기관 발명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영어의 엔지니어란 말이 바로 스팀엔진(증기기관)에서 비롯되었으며, 엔지니어링(공학)이라는 새로운 말 역시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을 생각하면, 기계공학이야말로 과거 2백 년에 걸친 기계문명 발달의 추진제 구실을 해왔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기계공학은 기계산업의 발전을 통해서만 그 기능을 다할 수 있다. 오늘날의 기계공학은 각 분야에 걸쳐 고도로 발전한 매우 정교한 응용과학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원자력에너지의 등장, 자동제어기술의 도입, 전자공학의 발달 등은 기계공학과 기계공업에 큰 변혁기를 가져왔으며, 최근 첨단산업의 출현은 기계공학과 기계산업에 새로운 과제를 안겨 주고 있다.

근대 과학에 입각한 기계공학은 구한말까지 우리 나라에 도입된 바가 없다. 구한말에 상공학교와 공업전습소가 있었으나, 이는 기능공 양성기관이었으며 기계공학과는 관련이 없었다.

일제는 우리 나라를 강점한 후 1916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고급 기술자 양성기관으로 삼았으나, 이 학교에 기계공학과가 설치된 것은 훨씬 뒤인 1938년이었다. 더욱이 이 학교뿐만 아니라 일제가 설립한 고등 교육기관은 한국인 학생에게는 입학 정원의 4분의 1 정도밖에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나라 청년으로서 이 학교에서 기계공학을 배운 사람은 겨우 20명 내외이다.

1939년에는 경성광산전문학교가 설립되어 광산기계과가 설치되었고, 1941년에는 유일한 관립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가 신설되어 기계공학과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들 학교에서도 사정은 비슷하여 한국인 학생의 입학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이 밖에 1944년 평양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어 기계공학과가 설치된 바 있다.

광복 이전까지 한국인으로서 기계공학을 전문학교나 대학에서 배운 사람은 앞에서 말한 국내의 학교 외에 일본의 학교에서 배운 사람이나 기타 해외에서 배운 사람까지 합해도 그 수가 아주 적었다.

더욱이 대학이나 연구소 또는 회사 등에서 중견 간부로 활약한 경험을 가진 인사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앞서 지적한 일제강점기의 학교들은 광복 후 1년 뒤에 국립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흡수되어 같은 대학 기계공학과로 이어졌다.

한편, 사립대학에서도 조선대학교에 1946년, 한양대학교에 1948년, 부산대학교에 1953년, 인하대학교에 1954년, 동아대학교에 1955년 각각 기계공학과가 발족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중앙대학교·울산공과대학 등 주요 사립대학과 경북대학교를 비롯하여 지방 국립대학에도 기계공학과가 예외 없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70, 1980년대로 이어져 현재 전국의 거의 모든 공과대학에 기계공학과가 설치되어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일제강점기에는 기계공학을 배울 기회가 매우 드물었으며, 더욱이 기계공학을 연구한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 기계공학의 역사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 비롯된다. 광복 이후 대학에서의 기계공학 교육은 경험 있는 교수의 태부족과 교육시설의 빈약으로 크게 성과를 올리기 어려웠다.

더욱이 정부의 대학에 대한 예산규모는 영세하고 산업도 침체되어 기계공학 발전에 활기를 불어넣을 요인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가운데서도 교재의 결핍은 직접 강의 자체에도 영향을 주는 실정이었다.

대체로 1946∼1955년 사이의 기간은 광복과 6·25전쟁을 거친 격변기로 앞에서 말한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서 후진을 양성한 시련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 1956∼1965년 사이는 6·25전쟁의 복구기로, 이 기간에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거쳐 경제재건정책이 실천에 옮겨지게 되어 기계공학 교육과 연구에 어느 정도 서광이 비치게 된 시기였다.

이 기간은 특히 절실했던 우리말 교재 저술이 활발했던 시기로, 대학교수들에 의해 기계공학의 각 분야별 기본 교재들이 저술 또는 번역되었다. 1946∼1955년 사이에 거의 두절되었던 외서 수입이 이 시기에 다시 시작되어, 구미 선진국의 최신 전문도서를 접하게 되었고, 대학의 강의내용에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이 기간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많은 교수들이 국제협조처(ICA) 원조에 의한 기술교육과 연구의 부흥방안으로 미네소타대학에서 해외연수의 기회를 가졌다. 주로 학생 실습기재이기는 하나 서울대학교에 적지 않은 실험기자재가 제공되어 기계공학 교육에도 많은 도움을 주게 되었다.

게다가 1964년부터 3년간 서울대학교의 거의 모든 교수들에게 경제개발 특별회계에 의하여 작으나마 연구비가 지급되었고, 1965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연구보고≫라는 논문집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1966∼1975년은 연구 태동기라고 볼 수 있으며, 교재 편찬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대학의 강의내용 등 교육면에서 체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연구에 대한 관심이 점증되어가는 시기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경제재건계획의 추진은 산업 전반의 급속한 팽창과 활황을 초래했고, 기계공업도 차츰 그 중요성이 인정되기에 이르렀으나 아직 본격적인 관심의 대상은 되지 못하였다.

한편, 산업기술에 관한 종합연구소로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설립되어 기계공학 관련 분야로서 금속가공연구실·내연기관연구실·자동제어연구실 등이 개설되었다.

또 1971년에는 한국과학원이 특수 대학원으로서 산업기술 향상에 이바지할 고급 기술인력 양성을 목표로 창설되어 기계공학과를 두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나 한국과학원의 발족은 정부의 특별한 지원에 힘입어 기계공학계에서도 신풍을 불어넣는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중 많은 대학은 실험기자재 부족에서 탈피하지 못하여 연구비의 절대 부족과 함께 본격적인 연구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76∼1985년의 기간은 기계공학의 발전에 큰 전기를 가져온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 정부는 중화학공업에 치중하는 산업발전정책을 추진하여 비로소 기계공업의 진정한 의의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창원 기계공업단지를 건설하게 되었으며, 1977년에는 한국기계연구소(초기에는 기계금속시험연구소)를 발족시키게 되었다. 한편, 방위산업의 추진도 기계공업 수준 향상에 적지 않은 촉매제 구실을 하였다.

이와 같은 기계공업의 급속한 신장은 기계공학의 발전에도 직접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76∼1985년 사이에는 정부 주도로 많은 공과대학에 실험실습기자재가 보강되었다.

1975∼1977년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일본 정부 무상원조(JGG)에 의한 현대식 실험기자재가 도입된 것을 출발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차관에 의한 실험기자재 도입은 지방의 국립대학교와 사립대학교에까지 확산되었다.

한편, 정부의 특성화 대학 육성방안의 실현으로 기계 계열 학과의 정원이 크게 늘어났으며,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몇 개 대학에서 이전의 기계공학과를 기계공학과와 기계설계학과로 양분하여, 후자의 경우 기계설계 교육에 보다 역점을 두게 하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났으며, 대학원의 정원을 증원함으로써 대학원 교육이 차츰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또한 해외에서 유학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자 수도 해마다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는 신진 연구자의 양과 질이 크게 향상되어 연구비의 점차적인 증액 및 기회 증대와 더불어 기계공학의 선진 연구방법이 정착되어 가고 있다.

1990년대에 세계는 바야흐로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수출입 1000억 달러 시대를 맞은 우리 나라도 사회 전체가 큰 변혁기에 들어섰음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1991년 정부는 제조업 경쟁력 강화방안을 수립하는 일환으로 첨단기술 분야 이공계 학생 증원을 단행하여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와 기계설계학과의 정원이 증원되었다. 또한 국내 유수 기업들의 주요 공과대학들에 대한 지원이 확산되어 갔다.

1993년 2월 문민정부가 발족하여 대통령자문 교육개혁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여 일차적으로 교육개혁시안을 발표한 바 있으나 공과대학 등의 전문교육문제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활동이 중단되었다.

기계공학 교육에 직접 관련된 사건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학과평가인정제를 1992년부터 새로 시행하기 시작한 일이다. 그 결과로 1993년에는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가 평가대상으로 지정되었으며, 교육목포·교육과정·학생·교수·시설 및 설비·행정·재정 등에 대한 상세한 자체 평가보고서를 낸 바 있다.

한편,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과대학의 학부제 도입이 새로운 풍조로 정착되어 가는 경향에 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1992년부터 전기·전자·제어공학과군으로 학부제가 시작된 이래로, 1995년도 신입생부터는 기계·기계설계·항공우주공학부가 발족되었다.

이러한 학부제의 도입은 이미 교육법시행령 개정으로 법적 뒷받침을 끝냈고, 서울대학교 학칙도 따라서 개정되었다. 학부제의 취지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특징을 가지며, 학생 위주의 교육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의 다양화가 시대적인 요청인 것을 감안해 보면 많은 대학이 한꺼번에 모두 학부제로 이행하는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1994년 교육부는 공과대학 국책 지원사업으로 충남대학교를 비롯한 8개 대학에 1995년도부터 매년 50억 원씩의 지원금을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이 중 영남대학교와 부산대학교가 기계공학, 전남대학교와 전북대학교는 자동차공학, 창원대학교는 자동화공학이 각각 지원대상 분야로 선정된 바 있다.

기계공학은 18세기의 산업혁명 이래 꾸준히 기계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하며 발달해왔다. 철도의 세기인 19세기, 자동차의 세기인 20세기로 상징되는 인류의 기계문명을 이끌어 온 기계공학의 공헌은 실로 지대하였다.

이와 같은 발전과정에서 기계공학의 응용 분야는 산업의 전 분야에 걸치게 되었으며, 기계공학은 점차 일반 공학의 총합학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20세기를 마감하는 현 시점에서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은 산업사회 전반의 장래에 큰 변혁을 예견하게 하고 있다. 21세기는 정보화사회를 주도할 많은 첨단기술들의 출현으로 기계공학도 이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어쩔 수 없이 크게 변모되어 갈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의 MIT공과대학 기계공학과에서는 정보관계의 연구교육을 강화할 목적으로 1994년 정보시스템기술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1995년 9월부터 학부의 교과과정을 30년 만에 크게 개정하여 실시하고 있다. 학과의 교육목표는 폭넓은 지식에 기초를 두고 시스템의 총합이 가능한 System Integrator 육성에 두는 것이다.

이전의 기계역학·열역학·유체역학·재료학의 과목 속에도 설계문제를 많이 넣어 System Integration의 관점에서 전통적인 기계공학에 새로운 해석과 의의를 부여하였다. 더 나아가 각 역학 분야의 상호관계나 공통되는 개념, 수학적 기초구조 또는 아날로지를 강조하고 서로 다른 분야를 총합적으로 이해시키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이미 산업계에 도입되고 있는 CAD(Computer Aided Design)·CAM(Computer Aided Manufacturing)· CAE(Computer Aided Engineering)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 기계공학이 상호교류 접목될 것이 예견되는 메커트로닉스(mechatronics)·반도체·나노테크놀로지(nanotechnology)·마이크로 머신·의공학·생물학 등 각 분야에 대한 기계공학의 기여를 생각한 최소한의 대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 기계공업의 역사는 겨우 30년에 불과하다. 100∼200년의 기계공업 발전의 역사를 지닌 선진공업국에 비교할 때 너무나 짧은 기간이다. 기계공업의 역사가 이러할 때 기계공학도 선진국에 비하여 엄청난 격차를 지니고 있음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공과대학의 기계공학 교육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이다. 이 무렵부터 정부의 관심이 높아졌고, 대학에 대한 투자도 차츰 증액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98년 IMF사태까지 지속되어 왔다. 1990년대 중반에 이미 국내 자동차 생산이 200만 대에 이르렀으나 국산 자동차는 해외시장에서 우수 품질의 고급차로는 인정받지 못하였다. 지난 30년간의 자동차공업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기계공업이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하였으나 질적으로는 부실한 면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선진공업국에 비하여 매우 부실한 교육환경에서 비롯되는데, 실험실습의 부실, 교수 수의 태부족, 교육시책의 획일성, 학습훈련의 부족 등 8·15광복 직후부터의 고질적인 파행적 교육실태는 오늘날까지 크게 개선되지 못한 실정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창의력 있고, 설계능력과 실제문제의 해결능력을 가진 기계기술자를 배출할 수 없다.

IMF사태를 초래한 것도 결국은 자체의 취약한 기술력을 개선하지 못한 채 무리한 수출물량정책에만 매달린 결과이다. 기계공학은 이러한 우리의 후진성을 벗어나고 21세기의 미래를 여는 데 관건이 되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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