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서(圖畵署)에 관한 제도적 규정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인다. 먼저 이전(吏典)의 경관직(京官職)을 보면, 도화서는 종6품의 아문(衙門)으로서 그 직능은 ‘장도화(掌圖畵)’라고만 되어 있다. 여기에는 정직(正職)으로서 제조(提調) 1인과 종6품인 별제(別提) 2인이, 잡직(雜職)으로서 화원(畵員) 20인과 임기가 만료된 뒤에도 계속 근무하는 자에게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 3인(종6품 1인, 종7품 1인, 종8품 1인)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화원의 보직은 선화(善畵) 1인, 선회(善繪) 1인, 화사(畵史) 1인, 회사(繪史) 2인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예전(禮典)에 의하면, 도화서는 예조에 소속된 관사(官司)로서 15명의 화학생도(畵學生徒)를 정원으로 더 두었다.
화원을 선발하는 취재(取才)에 있어서는 죽(竹)·산수·인물·영모(翎毛)·화초 등을 시험 과목으로 하였다. 그 중에서 두 가지에 대하여 시재(試才)하되 죽을 1등으로 하고, 산수를 2등, 영모를 3등, 화초를 4등으로 하여 화초의 그림에서 통(通)의 성적을 받으면 2분(分), 약(略)을 받으면 1분의 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인물·영모 이상은 차례로 등(等)을 올려서 각각 그 성적에 따른 분수(分數 : 점수)를 보태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형전(刑典)의 제사차비노(諸司差備奴)·근수노정액(根隨奴定額)을 보면, 도화서에도 각 관아의 노복으로 배정되는 차비노가 5인, 관원을 수행하는 관청의 하인인 근수노가 2인 등 모두 7인이 붙여졌다. 공전(工典)의 공장(工匠)에서는 배첩장(褙貼匠) 2인을 도화서에 소속시켰다.
도화서는 처음부터 예조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도전(鄭道傳)은 조선시대 통치 조직의 종합 체제를 제시하였을 때 화소공(畵塑工)을 공전 속에 열거한 바 있다. 도화원이 예조 소관으로 된 것은 1405년(태종 5)에 예조에서 마련한 6조의 분직급소속평정안(分職及所屬評定案)에 의해서였다.
제조 1인에 대하여는 1785년(정조 9)의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와서야 비로소 예조판서가 겸임한다고 명문화하였다. 도화서의 실직(實職)은 2인의 별제가 관장하였다. 1464년(세조 10)까지만 해도 도화원은 5품 관아로서 5품직의 별좌(別坐)가 실무를 담당하였다.
도화원이 1470년(성종 1)에 도화서로 개칭되면서 종6품아문으로 격하되었다. 별좌는 화원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였다. 그러나 화원은 천한 공장과 다를 바 없어 재주가 비록 뛰어났다 하여도 그 자리에 가능한 한 앉히지 않고 사대부 가운데서 그림에 밝아 화격(畵格)을 잘 아는 사람을 선택하여 그 직무를 맡도록 하였다.
1746년(영조 22)에 『경국대전』을 대폭 개수한 『속대전(續大典)』에서는 종래의 화학생도의 정원 15인이 30인으로 배가되었고, 잉사화원(仍仕畵員)에 종6품 1인을 증원하였다. 또 『대전통편』에서는 도화서에 전자관(篆字官) 2인을 더 두고 화원의 정원도 30인으로 증원해 놓았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화원의 임무가 그만큼 많아졌음을 뜻하며, 일찍부터 재능 있는 자를 한 번에 키워서 우수한 화원을 확보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무 주관자인 별제 2인의 자리는 폐지되었다. 그 대신 1865년(고종 2)에 설정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같은 품질의 종6품의 화학교수(畵學敎授) 1인을 두었다.
다른 관청에는 처음부터 전문 교수가 있었던 것에 비하여 도화서는 뒤늦게 19세기 중엽에야 그 제도가 명시되고 있다. 하지만 문헌기록에서는 이미 17세기부터 종6품의 교수 직함을 가진 화원들의 이름이 확인된다. 화격이 뛰어난 화원이 교수로서의 임무 수행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지도적 지위를 지켜 오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도화서 청사는 한성의 중부 견평방(堅平坊: 지금의 서울 종로구 공평동 또는 견지동)에 위치하였다.
도화서는 비록 왕실·사대부 등의 요청을 충족시키는 회화 작업을 담당하는 관청이긴 했으나 국가가 제도적으로 화가의 양성과 보호·보장의 토대를 마련한 곳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화원들은 그들의 회화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도화서는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고 그 업적을 이어 나가는 데 중심적 구실을 한 기관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