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는 공간의 표상을 일정한 형식을 이용해 표현한 것으로, 대부분 2차원의 평면에 그림의 형태로 그려진다. 사물의 위치 표현에서 객관적인 정확성을 지향하고, 위치를 구별하기 위해 지명이 함께 기재되기 때문에 사물의 미(美)나 본질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회화(繪畫)와는 차이가 있다. 땅위의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의 형식속에서 존재하므로 시 · 공간적인 위치는 그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인간은 사물의 위치 정보를 바탕으로 자아속에 표상을 구성하고, 일정한 형식을 통해 이를 외적으로 표현한다. 지도위에 표현된 지식들은 객관화된 지리 정보로 전환되어, 사회에서 확산된다. 정보론의 관점에서 보면 지도는 지리정보의 생산자와 수요자를 연결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종래의 지도는 대부분 종이로 만들어졌으나 기술의 발달로 수치 지도 뿐만 아니라 웹 지도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어 이용되고 있다.
지도는 제작자가 공간 표상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서양의 경우 기원전 5세기부터 그리스의 학자들은 지구는 둥글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기하학적으로 구체(球體)가 가장 완벽한 형태로, 지구도 그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적 근거와 물리적인 증거를 추가하여 이를 지지하였다. 이후 여러 천문학자들은 지구의 둘레와 직경의 측정을 시도하였다.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를 360도로 나누고 도(度)를 분(分)과 초(秒)로 나누는 위선과 경선을 고안하여 좌표를 바탕으로 세계지도를 제작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저술한 『지리학(Geographia)』(AD 150년경)에 수록된 지도는 간단한 원추 도형법에 기초하고 있다. 비록 천동설에 입각한 오류를 빚고 있으나 근대 지도의 기초를 이룬 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서양 문명의 중심이 로마를 거쳐 서유럽으로 옮겨지면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세계가 표상화되었다. 지도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제작되었으며. 내용은 성서와 그리스 · 로마 신화나 상상력에 의존하였다. 당시의 도로지도, 해도, 도시 지도 등은 경위선 좌표에 의존한 것이 아닌 회화 형태로 제작되었다. 세계지도 중 대표적인 지도가 티오맵(TO-Map)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는 중세적 세계관에 밀려 사장되었으나, 중세시대 이슬람 세계 지도 발달에 기초를 이루었다.
14∼16세기 르네상스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극복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지도는 다시 부활되었다. 특히 당시 측량 기술 발달과 항해의 확대가 이루어지고 인쇄 기술과 종이가 보급되면서 지도의 지리정보가 수정되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바스코다가마 등에 의해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면서 지리 정보의 수요가 급격이 늘어나 지도는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금속활자와 동판 인쇄는 이전의 목판 인쇄보다 훨씬 정교한 지도 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새로운 지도 투영법들이 고안되었고, 메르카토르는 정각도법을 이용하여, 항해에 유용한 지도를 제작하였다. 유럽에서의 종교개혁은 선교사들을 통해 동 · 서양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1602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북경에서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하였다.
유럽의 지도 제작기술은 식민지 개척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1533년 프리시우스에 의해 개발된 삼각측량법은 1600년 독일에서 지도 제작에 사용되었으며, 이후 프랑스에서는 카시니가 이 기술을 바탕으로 국가 전체 지도를 만들었다. 이후 이에 자극받은 영국은 국가 지도를 제작하였다. 지도 제작을 종래 개인이나 가문의 차원에서 벗어나 국가에서 지리 정보를 생산하고 이를 보급하는 역할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국가 형태가 근대국가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17∼19세기에는 본느, 람베르트, 상송 등에 의해 여러 투영법이 개발되었고 다양한 주제도가 제작되었다. 1734년 영국의 해리슨에 의해서 크로노미터가 발명되어 정확한 경도 측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1796년에는 석판 인쇄술이 개발되어 컬러 지도의 인쇄가 가능해졌고 1910년부터 옵셋 인쇄가 지도 제작에 응용되었다.
20세기 들어 지도는 지리정보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인식되었다. 지도가 단순히 사물의 위치 정보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지리 정보의 소통과정에서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중시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수요자들이 필요로 하는 지리 정보를 주목하였고, 이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지도 제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컴퓨터의 도입이었다. 특히 GIS를 통해 지리정보가 수치화되어 데이터베이스가 만들어지고, 이는 수치정보의 처리 능력과 접목되면서, 지도에서 개념, 기술, 소비 등 모든 차원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다. 과거의 종이 지도들은 디지털 형식으로 새롭게 제작되었으며 또한 인터넷이 보편적으로 보급되면서 이전과 다른 형태의 지도가 보급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의 세계 표상은 서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도를 제작하기 이전에 중국의 한나라의 창행[張衡]은 천하를 둥근 하늘과 평평하고 네모난 땅[天圓地方]으로 보았고, 그에 입각하여 격자 체계를 설정하고 하늘과 땅을 측정하였다. 2세기 후, 진나라의 초대 공무 장관으로 임명된 배수(裵秀)는 8매로 된 중국의 정밀한 지도를 만들면서 창행에 고안한 장방형 격자 체계를 이용하였다.
배수가 지도 좌표에 대해 사용한 용어인 칭[經]과 웨이[緯]는 섬유를 짜는데 있어서 오래전부터 사용한 용어였다. 이후 중국인들은 지도 제작에서 방형의 격자 체계를 꾸준히 사용하였다. 당나라시대에는 전국의 방안식 지도를 완성하였으며 1555년 명나라의 나홍선(羅洪先)이 『광여도(廣輿圖)』를 목판으로 제작하면서 방안식 지도의 발달은 절정에 이르렀다. 방안도법은 17세기까지 중국의 보편적인 지도 제작 기술이었다.
마카오를 통하여 서양 문물이 중국으로 유입되면서 중국의 지도 제작기술도 크게 바뀌었다. 1602년 마테오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는 중국인들의 천하 표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높이 1.79m. 각 폭이 69㎝ 크기의 6폭의 병풍으로 제작된 이 지도는 이전의 세계지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중국인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지도에 묘사된 세계의 표상은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천하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중화 세계관을 바꾸는데 그 영향은 지대하였다. 1603년에는 『양의현람도』를 제작하였고, 1610년 서거할 때까지 지도를 제작하여 황제에 헌상하기도 하였다.
리치가 서거한 이후에도 이후 중국에 거주하는 선교사들에 의해 지도 제작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17세기에는 알레니의 『직방외기』와 「만국전도」, 아담 샬의 「지구십이장원형도」,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의 『곤여도설』 및 「곤여전도」등 여러 지도와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유럽의 자연 과학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선교사로 하여금 중국 전토에 대해 측량과 지도 제작을 지시하였다. 측량 사업은 1709년 1차로 마무리되었고, 1717년 『황여전람도』가 완성되었다.
경도는 오류를 줄이기 위해 북경의 경도가 본초 자오선이 되었고, 위도는 북극성의 지평 고도를 이용하여 측정했다. 지명 표기는 한자로 하였으며, 만리장성 이북은 만주문자를 사용하였다. 이 지도를 계기로 중국의 전통적인 방안식 지도 제작은 막을 내렸다. 1737년 프랑스에서는 당빌이 유럽에서 「조선왕국도」가 포함된 『황여전람도』를 번역하여 제작하면서, 동아시아의 지리 정보가 유럽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사료(史料)를 통해서 볼 때 옛부터 지도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이미 지도를 제작하여 활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는 왕권의 강화와 국가 통치의 필요성으로 인해 지도가 제작되었다.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후기 들어 상업경제의 발달로 지도 보급이 활발하였으며, 서양 지도 제작 기술이 중국을 통해 유입되었고,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재해석하여 세계 지도를 그리기도 하였다. 동아시아 정세 변화로 북방 및 동해의 강역에 대한 자세한 지도도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으로 통해 국토의 표상이 구체화되었으며, 이를 그린 대표적인 지도가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이다.
고을을 상세하게 그린 군현지도도 다양한 모습으로 그렸졌고, 이 중 방안(方眼)위에 그린 지도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1861년에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제작의 바탕이 되면서 국토의 표상이 완성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근대 지도의 제작을 시도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강점되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 중 우리나라의 지도는 일본에 의해 제작되었다. 광복 후 미군정을 거쳐 1961년에 비로서 국토지리정보원의 전신인 국립건설연구소에 의해 민간인용 지도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경제 발전으로 민간 수요가 늘어나고, 정보 기술을 이용한 지도 제작이 크게 발달하였다.
2008년에는 대한민국의 지도 제작 역량을 모아 『국가지도집』이 발간되었다. 정보 기술의 발달로 매우 다양한 형태의 지도가 만들어져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토해양부 산하의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지도를 제작하며, 지도에 수록된 지리 정보는 주제도, 관광지도, 웹지도 등 여러 형태로 가공되어 사회에서 활용된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지도를 그리고 있었으나 지도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 · 『삼국유사』 등의 지리지와 벽화 등을 통해 당시 지도의 내용을 엿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영류왕 11년(628)에 견당사(遣唐使)를 통하여 당나라에 고구려의 지도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평양 부근에서 발굴된 4세기경의 고구려 벽화속의 지도로 미루어 당시 지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지도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남부여조에 수록된 ‘도적(圖籍)’이라는 표현과 ‘백제지리지(百濟地理志)’라는 기록이 있어 지도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신라에도 지리지가 있었고, 지도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문무왕조(671년, 문무왕 11년)에 ‘신라와 백제간의 경계를 지도에 의하여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증거이다.
고려시대는 원 · 송과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불교를 통한 인도에 대한 지식,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한 이슬람 세계와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지리 지식이 유입되었다. 우리나라의 윤곽이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 있는 지도는 없다. 1396년(태조 5)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이첨(李詹)의 「삼국도후서(三國圖後序)」의 내용에서 우리나라의 지형과 하천의 서술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 정확한 지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 윤보(尹輔)가 당나라 현장법사(玄奘法師)의 서역기에 의거하여 「오천축국도(伍天竺國圖)」를, 공민왕 재위기(1352-1374)에 나흥유(羅興儒)가 중국 및 우리나라 지도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명나라 나홍선이 1555년경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지도책인 『광여도』에 2면의 크기로 「조선도」가 실려 있다. 조선시대의 팔도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나, 한반도 모습으로 보아 바탕이 된 지도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은 개국하면서 왕권 확립을 위해 지리서와 지도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전에 역사서의 일부로 편찬되던 지리지 편찬 관행에서 벗어나 『경상도지리지』(1425), 양성지의 『팔도지리지』(1479), 『동국여지승람』(1486) 등 독립적인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역법(曆法)의 확립을 위한 천문학의 연구와 함께 각종 관측 기구가 발명되었고, 우리나라와 세계를 그린 지도가 만들어졌다.
1402년(태종 2)에는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완성하였다.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사본이 일본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등에 전하고 있다. 권근(權近)이 지도의 발문에,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천태승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를 중국에서 들여와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 검상(檢詳) 이회(李薈)가 검토하여, 하나의 지도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어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발문의 ‘「성교광피도」는 지도가 상세하였고, 「혼일강리도」는 국도연혁(國都沿革)이 상세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지도의 윤곽, 지명, 하천 등은 전자를, 상단의 역대 제왕의 국도연혁은 후자를 이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에 묘사된 일본지도는 박돈지(朴敦之)가 1401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가져온 「일본도」의 내용이 수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의 조선 부분은 이회가 그린 「팔도지도」로 고려시대의 「오도양계도」를 바탕으로 일부 수정, 보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적색으로 한양의 위치와 산맥의 흐름이 그려져 있다.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하계망이 비교적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압록강, 두만강의 유로는 지금과 다르게 동서로 그려져 있으며 백두산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조선을 상세하게 그린 가장 오래된 지도로 조선 초기 우리나라 지도 발달의 일면을 보여준다.
동아시아 중 일본을 그린 지도로는 『해동제국기』에 삽입된 목판본 지도가 있다. 이 책은 신숙주(申叔舟)가 일본을 다녀온 직후, 1471년(성종 2)에 왕명을 받아 편찬한 책으로서 일본의 지세 · 국가 사정 · 교류 연혁 및 사신을 대하는 예례(醴例)의 절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 지도 6매와 조선의 웅천, 동래, 염포를 그린 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세종 조 압록강과 두만강에 사군 육진이 설치되는 등 북방 영토가 확장되면서 상세하고 정확한 전도 제작이 요구되었다. 세종은 1436년(세종 18) 정척(鄭陟)에게 함길도, 평안도, 황해도를 자세히 살피라는 명을 하였으며, 이후 1451년(문종 1)「양계지도」를 완성하였다.
1453년(단종 1)에 양성지(梁誠之)는 조선전도, 팔도도, 각 주현도 제작의 명을 받아 1463년(세조 9)에 「동국지도」를 그렸다. 정척과 양성지의 지도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같은 계열의 지도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된 「조선방역도」와 「조선팔도지도」이다. 「조선방역도」는 이회의 「팔도지도」보다 내용이 상세할 뿐 아니라 국토 윤곽, 하천 유로 등이 정확하게 묘사되었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팔도총도」와 도별도가 첨부되어 있다. 이 지도는 보통 「동람도(東覽圖)」라고 불리며 책의 첫머리에 「팔도총도」가, 각 도의 앞에 도별도가 첨부되어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서문에 ‘경도(京都)의 첫머리에 지도를 첨부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초고본에 지도가 수록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도 내용은 이회의 「팔도지도」(1402)와 정척 · 양성지의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동람도」는 지리정보의 양이 적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형태도 실제와 많은 차이가 있다. 이는 지도 제작의 목적이 지리지를 편찬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람도」는 이후 도별도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을 통해 서구식 지도가 유입되어 우리나라 지도 제작 기술은 크게 변화하였다. 17세기 초에 북경을 방문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제작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접하였다. 1603년이광정(李光庭) · 권희(權僖)가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구라파국 여지도(歐羅巴國 輿地圖)」를 가져왔다는 내용이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 기록되어 있다.
1603년 황동명(黃東溟)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온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가 일제강점기 중 한국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1708년에 조선에서는 숙종의 명으로 관상감(觀象監)에서 회입(繪入) 「곤여만국전도」(보물, 1985년 지정)를 제작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을 통해 유입된 세계지도는 조선인들의 세계 표상에 큰 변화를 주게 되었다.
중국으로부터 서구식 세계지도가 들어왔으나 명이 멸망한 후 정신적으로는 조선이 중화 문명을 지키고 있다는 문화적 자존심은 ‘조선 중화 사상’으로 나타났다. 따라라 동양 전통의 천하 형태를 묘사한 지도 제작이 지속되었다. 이 계통의 지도로서 「조선본 천하여지도」(보물, 2008년 지정)가 대표적이다. 이 지도는 조선 전기의 세계지도를 계승하는 17세기의 대표적인 지도이다.
중국 왕반(王伴)이 제작한 「여지도(輿地圖)」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증보한 것이다. 지도가 표현하고 있는 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조선, 일본, 유구 그리고 동암아시아의 일부 조공국이 그려져 있는 정도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의 지도로 「천하대총일람지도(天下大總一覽之圖)」(국립중앙도서관)와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숭실대 박물관)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새로운 형태의 세계지도인 「천하도」가 도별 지도첩에 포함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이 지도의 제작 연대는 대부분 17세기 이후이다. 구성을 보면 천하의 중앙에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륙이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비해(裨海), 그 외곽에 환대륙, 영해(瀛海)와 외대륙이 둘러싸고, 각 대륙과 바다에는 약 150여 개의 지명들이 기재되어 있다.
수록 지명 중 실존하는 국가는 중심 대륙과 내해에 위치한 중국, 조선, 일본, 유구국 뿐이다. 「천하도」가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에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주목받아 왔다. 지도의 기원과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었으나, 최근에는 동양에 전래된 서구식 세계지도를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주관적으로 해석한 결과물로 보고 있다.
동아시아를 그린 지도로 「해동삼국도(海東三國圖)」(규장각)가 있다. 당시 중국과 일본의 지리 정보를 결합하여 그린 동아시아 지도이다. 조선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북경까지, 북쪽으로 영고탑, 서남쪽으로 중국 연해지역과 유구 · 대만, 동남쪽으로 일본까지 그려져 있다.
당시에는 일본을 상세하게 그린 지도들도 적지 않게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지도가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그린 「일본여도」(해남 윤선도 박물관, 보물, 1968년 지정)가 있으며, 일본의 각 지방의 행정구역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선의 전통과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은 역사지리학에서 실증적인 학풍을 불러 일으켰으며 지도들을 통해 이들 내용을 수록한 지도가 만들어 졌다. 목판본으로 제작된 「천하고금대총편람도(天下古今大總便覽圖)」(1666년)와 「조선팔도고금총람도(朝鮮八道古今總覽圖)」(1673년)가 대표적이다. 호조참판을 지냈던 김수홍(金壽弘)이 역사지리 내용을 근지(謹識)하여 편찬한 책이다. 중국의 역사 지리와 조선 각 고을의 역사적인 내용을 지도로 표현한 것으로, 조선의 윤곽은 전기의 계열을 따르고 있으며 한양 도성은 축척에 관계없이 크게 그려져 있다.
당시 제작된 조선전도와 도별도는 대부분 조선 전기의 지도에서 나타난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도별도의 경우 조선 전기의 「동람도」 계열 지도의 내용을 따르고 있었으며, 이들은 목판을 통하여 다양한 형태로 일반에게 보급되었다. 「여지도」, 「천하지도」, 「지도」 등의 제호가 붙은 다양한 형태의 지도책들이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휴대하기 편리하도록 소형으로 된 수진본(袖珍本) 지도책이 보급되었다.
초기의 지도는 조선전도와 도별도로 구성되어 있으나 후기로 갈수록 천하도, 중국지도, 일본지도, 유구국도 등이 포함되어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들 지도가 목판을 통해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은 당시 일반인들의 지리지식의 욕구 수준이 중국과 일본을 넘어 세계로까지 확대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지도와 도별도 제작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지도는 정상기(鄭尙驥)가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이다. 조선의 도별 지도와 전도로 구성되며, 함경도는 남북 각 1매, 경기도와 충청도는 합하여 8매로 제작된 지도이다. 이 지도는 정확한 위치나 거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정확한 축척을 사용한 것이 이전 지도와 다른 점이다.
지도의 여백에 제척(梯尺)을 종(縱)으로 표시하고 그 옆에 백리척(百里尺)이라고 표시하였는데, 약 40만분의 1의 축척이 된다.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의 아들 정항령(鄭恒齡) 등에 의해 계속 수정 · 보완되었다. 조선전도의 구도는 압록강이 약간 왜곡되어 있을 뿐 실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16-17세기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화는 조선인들의 강역 인식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1592년 임진년과 정유년(1597년)의 일본의 재침입을 거치고,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거치면서 강역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영토에 대해 높아진 인식은 지도 제작에 영향을 미쳐 많은 관방도가 제작되었다. 이들은 북방과 동해의 강역 및 해안 관방과 군사 지도로 나누어진다.
1644년 중국 대륙에서 명이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 조선은 중화 문화의 유일한 적자라고 생각하였다. 불안정한 중원의 정세로 인해 언제든지 청나라가 그들의 발상지였던 영고탑으로 돌아갈 것이며, 회귀 과정에서 청나라가 조선으로 침입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691년(숙종 17)과 1712년(숙종 38) 중국이 지도 제작을 이유로 조선의 지도를 요구하면서 위기감은 고조에 달했다.
이와 같은 북방 강역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그린 지도가 적지 않게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지도가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보물, 2008년 지정)이다. 1706년 북경에서 사신으로 갔던 이이명(李頤命)이 『주승필람(籌勝必覽)』 속에 들어 있던 「요계관방도」, 「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 『성경지(盛京志)』의 내용을 활용하여 그린 지도이다.
『주승필람』은 명나라말 직방랑(職方郞)이었던 선극근(仙克謹)이 저술한 국방, 지리 책자였다. 특히 「산동해방지도」는 청나라에서 대외 유출을 금한 지도였기 때문에 화원에게 모사하게 하였다. 이이명은 자신이 들여온 두 자료에 『성경지』의 지도와 지리지식을 결합시켜 10폭짜리 병풍지도를 완성하였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보물, 2007년 지정)는 1746년(영조 22) 청나라가 경작지로 늘리려고 시도한 책문이설(柵門移設)과 관련하여 제작된 지도이다.
조선은 이설과 관련하여 강희년간의 전례을 확인하기 위해 새로 수입된 수정본 『성경지』를 찾았고, 이의 자세함을 들은 영조는 조선과 관련이 깊은 토문강(土門江), 성경, 영고탑 일대의 자세한 지도를 그려 올리도록 하였다. 이 지도는 관방지도 중 대표적인 것으로 지도에 영고탑의 유래, 청나라의 건국 과정과 군사 편제, 몽고에 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18세기 청나라가 정치적인 안정을 찾고, 조선의 청에 대한 태도가 유화적인 자세로 변화되면서, 중국에서 제작된 지도들이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린 지도가 「서북계도(西北界圖)」이다. 이 지도는 조선의 북부와 만주 지역 일대를 그린 지도로 『황여전람도』의 내용이 적지 않게 반영되어 있어 당시 지리 정보의 교류와 조선의 북방 강역 인식의 내용을 보여준다.
울릉도는 1417년(태종 17)부터 주민쇄환정책이 실시되어 지리 지식은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지도에서 울릉도와 우산도의 묘사는 위치 정도의 표현도에 불과하였다. 1693년(숙종 19)에 발생한 안용복(安龍福) 사건을 계기로 1697년부터 정기적인 수토(搜討)가 실시되었다. 이로써 울릉도의 지리 지식이 유입되면서 상세한 지도가 그려졌다. 이들 지도의 내용은 당시 조선인들의 울릉도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공간 표상의 내용을 보여준다.
수토를 통해 유입된 지리 정보는 당시 제작된 군현지도책에 삽입된 울릉도 지도의 바탕이 되었다. 대표적인 지도로 『해동지도』(규장각, 보물, 2008년 지정)속에 삽입된 울릉도 지도는 지도의 묘사방법 등이 수토 결과 제작된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지명이 더욱 상세해져 수토로 인해 지리정보가 구체화되었음을 보여준다.
20리 방안 위에 그려진 『조선지도』(보물, 2008년 지정)에 삽입된 울릉도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에서 독도를 ‘소위우산도(所謂于山島)’로 기재하던 한계에서 벗어나 동쪽 약 40리 떨어진 곳에 우산도(于山島)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울릉도에 읍이 설치가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을 지도안에 삽입된 것은 동해 강역에 대한 조선 정부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
울릉도가 가장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는 1882년이규원(李奎遠)이 울릉도 검찰 후 그린 지도이다. 1881년 울릉도에 일본인이 침입한 사건으로 조선 조정은 일본에 항의 공문을 발송하는 동시에, 이전부터 실시되었던 주민쇄환정책을 재고하기 위해 현지 조사를 위한 검찰사를 파견하였다. 이규원은 검찰 활동 이후 『검찰일기』와 함께 2점의 지도를 그려 올렸다.
「울릉도외도」는 중앙에 나리 분지를 묘사하고, 주변에 산지를 폐화식(閉花式)으로 표현하였다. 회화 수준은 다른 수토 지도에 비해 매우 뛰어나며, 수록 지명도 매우 자세하다. 「울릉도내도」는 나리분지를 그린 것이며 이는 설읍(設邑)에 대비한 것이다.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같은 해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었고, 1900년 울도군(鬱島郡)이 설치되었다.
북방 강역과 동해 일대를 그린 지도 외에 해로와 군사 내용을 담은 지도들이 적지 않게 제작되었다. 해로를 그린 대표적인 지도로 「영남호남연해형편도(嶺南湖南沿海形便圖)」(국립중앙도서관)가 있다. 남해안 일대의 해로와 관방을 그린 지도로 봉수, 포구의 선박 수용 규모, 대피 포구 등이 묘사되어 있다. 수로도이면서 군사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해안선의 묘사가 매우 정확하다.
방위를 위해 군사목적으로 그린 대표적인 지도는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보물, 2007년 지정)이다. 17세기 말에 비변사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의 구도는 조선 전기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국경지대에 봉수대가 밀집되어 있고, 중요한 곳은 이중 · 삼중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시 전국적인 봉수 체계를 보여주면서 강역 보호의 의지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이 시기에는 이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지도가 제작되었다. 지방을 그리는 단위는 도별도가 대부분이었으나 이때부터 고을 단위의 지도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어 책으로 엮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림으로 표현되던 지도가 방안 격자위에 그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대축척지도 제작의 바탕이 되었다. 19세기에는 동아시아가 서구 열강세력들의 각축장이 되면서 세계 지리 지식이 요구되었다. 세계 지도들이 인쇄본으로 제작되면서 보급되었고, 교육에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들어 각 고을을 그린 지도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군현(郡縣)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 국토의 근간을 이루는 문화, 행정적인 단위이다. 종래 전국과 도별의 수준을 넘어 고을 단위의 지도를 제작하는 국가의 지역 파악이 고을 단위까지 구체화되어 가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들 지도 유형은 장책(粧冊)의 형태에 따라 낱장으로 그려지거나, 지도책으로 제책된 경우, 지리지에 부도(附圖)로 되어 삽입된 것으로 나뉜다. 주체에 따라 지방에서 그린 것과 이를 중앙에서 재편집하여 제작한 것으로 나눈다. 내용상으로는 회화식으로 묘사된 것과 방안 격자 위에 그려진 것으로 구분한다.
고을 단위의 공간 표상 그리는데 회화 기법이 도입되는 것은 초기의 지도 제작에서 화원(畵員)들이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경 산수화에 익숙한 화원들은 고을 지도 제작에서 기호를 이용하여 정확한 공간 표상을 그리려는 것보다는 고을의 전체적인 경관과, 장소의 이미지 표현에 노력하였다. 그리는 과정에서 장소에 대한 화원의 주관적인 해석이 개입되면서 지도의 본질에 왜곡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고을의 이미지를 전달하는데 매우 효율적이었으며, 때로는 예술적인 가치도 내재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지도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사회에 수용되었다. 한양을 그린 『도성도』(보물, 2008년 지정), 『진주성도』(보물, 2008년 지정) 등이 대표적이다.
고을의 상세한 지리 정보가 전국 단위로 요구되면서 산, 건물 등의 장소 묘사에서 일률적인 방법의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현대 지도에서 범례에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종래 지방 화원들에 의해 주관적으로 표현되던 수준을 극복하여 공간 표상의 형성에 객관화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대표적인 지도가 『해동지도(海東地圖)』(보물, 2008년 지정)이다.
『해동지도』는 고을의 지리 정보를 홍문관에서 편집하여 제작한 지도책이다. 각 고을은 규모에 상관없이 일정한 형식과 크기로 그렸고, 장소의 표현 방법도 동일하다. 고을 뿐만 아니라 「천하도」 등의 세계 지도부터 「요계관방도」 등의 관방지도, 진보 지도를 다양하게 수록하고 있어 당시의 사회 경제상의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유형의 지도책으로 『광여도(廣輿圖)』(규장각),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 등 수종이 있다. 내용이 유사한 지도들이 다양한 지도책으로 만들어진 것은 당시 고을의 지리 정보를 담은 지도의 필사가 널리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중앙에서 편집되어 만들어진 군현지도책과는 달리 지방에서는 고을 화원들에 의해 다양한 화풍에 의해 낱장으로 지도가 만들어졌다. 지도는 지방의 수령이 지역을 다스리면서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수령이 부임하면 지방 화원들이 지도를 올리는 것은 조선시대의 전통이었다.
이들 지도들이 책으로 엮어진 대표적인 사례가 18세기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첨부된 지도들이다. 1757년홍양한(洪亮漢, 1719-1763)의 건의로 홍문관에서 읍지를 수집하여 간행한 것으로 조선 전기의 『동국여지승람』 이후 달라진 내용을 수록하였다, 각 고을 읍지의 첫머리에 채색지도가 실려 있다. 각 고을의 화원들이 그린 내용이 수정되지 않고 수록되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형태로 고을이 표현되어 있다.
고을에서 그린 지도가 더욱 상세하게 그려져 집대성된 계기는 대원군이 집권하던 1872년(고종 8)이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후 대응책을 모색하면서 대원군은 1871년에는 전국적인 읍지 편찬사업을, 이듬해에는 삼군부(三軍府)에 각 고을의 상세한 지도를 그려 올리라고 지시하였다. 459매로 구성된 이들 지도는 고을 뿐 아니라 진보, 목장 등 관방 지도를 포함한다.
일부 도를 제외하고는 군현에서 화원들이 그린 지도를 거의 그대로 올렸기 때문에 지방의 화풍과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지도학적인 수준은 떨어지나 고을에 대한 주관적인 표상이 반영되어 있고, 당시 고을의 지명과 지리적인 내용 등을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조선 후기에는 방안 위에 고을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지도 제작에서 방안식 도법을 처음 사용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조선 전도에 방안 격자가 나타나는 것은 앞서 언급된 중국에서 제작된 『광여도』의 「조선도」이다. 조선 전기의 지도 중 방안이 표시된 지도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세종 때는 간의(簡儀) 제도가 완성되어 천체의 고도가 관측되면서 위도가, 천문용 시계인 혼천의를 통해 경도 측정이 가능하였다. 10리 간격으로 북을 치도록 제작된 기리고차(記里鼓車)는 정확한 거리의 측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조선 전기에 「천상열차분야지도」 등의 천문도가 제작된 것을 볼 때 지도 제작에 방안 사용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조선 후기 청나라가 「황여전람도」를 제작하면서 1713년(숙종 39) 중국 사신 하국주(何國柱)가 한성의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였다는 기록과, 1791년(정조 13)에 한양을 기준으로 비변사에 소장된 지도를 이용하여 팔도 관찰사영의 위도와 편도를 측정하였다는 내용은 지도 제작에 경위선을 이용하였음을 의미한다.
군현지도 중 방안이 그려져 있는 지도로서 가장 초기의 것은 『비변사지도(備邊司地圖)』(보물, 2008년 지정)로 알려져 있는 지도집이다. 이 지도책에서 고을은 7.0∼8.5㎜ 내외 크기의 방안에 그려져 있으며 이는 1리에 해당된다. 도로를 격자를 따라 직선으로 표현하고, 봉수망이 강조되어 있는 등 다른 회화식 지도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방안 격자를 통해 장소의 위치와 거리 표현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각 군현의 축척이 동일하지 않고 인접 군현과 연결되지 않아, 전국을 동일한 좌표체계를 지니는 전통적인 방안식 지도와는 차이가 있다.
전국 각 군현을 동일한 크기의 방안 위에 그린 지도로 『조선지도』(보물, 2008년 지정)와 『팔도군현지도』(규장각), 『해동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 등이 있다. 1767∼1776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에는 모든 고을이 통일적으로 4.2cm 크기의 방안위에 그려져 있으며 이는 20리 방안에 해당된다. 특히 『해동여지도』에는 방안에 수치가 기재되어 있어 이 도법이 전국의 모든 고을의 위치를 단일 좌표 체계속에 표현하였음을 보여준다.
신경준(申景濬)의 『여암유고(旅菴遺稿)』 에서 ‘영조의 명을 받아 주척 1촌을 1선으로 하여 종선(縱線) 76개, 횡선(橫線) 131개로 전국을 그렸다’는 기록과 지도의 방안 수치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방안식 지도는 영조의 명을 받아 신경준이 제작한 지도로 추정되고 있다. 『동국지도 3』(국립중앙도서관)은 20리 방안식 지도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20리 방안도법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도별도로 「경상총여도(慶尙總輿圖)」(보물, 2008년 지정)와 「함경도 · 경기도 · 강원도지도」(보물, 2008년 지정)가 있다. 지도에 수록된 내용들이 대부분 『청구도』와 『대동여지도』과 적지 않게 일치되는 것을 보아 이들 지도가 19세기 제작된 대축척 조선전도의 바탕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19세기에 제작된 대축척 조선전도는 대부분 방안도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 필사본으로 만들어 졌으며 1861년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대동여지도』를 목판으로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필사본으로 대표적인 것은 『청구도(靑邱圖)』이다. 김정호가 제작하였으며, 지도 축척은 『대동여지도』와 동일하다. 남북을 29층으로 나누고, 한 면에 100리×70리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여(東輿)』(국립중앙박물관)는 지도의 1층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기재되어 있다. 남북 14층으로 전국을 구분하였다. 지도를 펼쳐서 연결하면 세로 5.2m, 가로 2.9m의 지도가 된다. 방안의 구성 내용은 『청구도』와 유사하다. 이외에 『대동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조선도』(일본 오사카부립도서관)의 경우 이들 지도와 내용이 매우 같다.
목판본으로 제작된 『대동여지도』(1861)는 우리나라 고지도 발달의 정점에 있는 지도이다. 한반도를 동서 방향으로 나누어 각 층을 절첩하여 분첩절첩식(分帖折帖式)으로 제작되었다. 남북을 22층으로 나누었으며, 동-서는 층마다 1∼18면으로 서로 다르다. 각 면의 크기는 30.0×20.0cm이다. 남북 22층을 모아 붙이면 세로 약 7m, 가로 약 4m의 지도가 된다.
지도의 축척에 대해서는 1:150,000∼1:260,000에 이르기까지 견해가 다양하다. 이는 축척의 산출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지리 정보는 산줄기, 하천, 군 경계와 지도표 범례를 이용하였고, 지명과 함께 주기(註記)도 기재되어 있다. 약 11,600여 개의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일부 지명에서 역사적인 사건이나 지리적인 위치를 주기를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산줄기는 전통적인 산맥 체계에 근거하여 산줄기로 표현하였으며, 산체의 크기는 굵기를 달리 하여 구별하였다. 산의 묘사에서는 험준하고 높은 산은 봉우리를 겹쳐 그렸고, 일부 산지는 톱니 모양으로 묘사하였다. 산성과 봉수가 있는 산지에는 범례와 함께 지명을 기재하였으며, 중요한 산성과 능침(陵寢)이 있는 곳은 과장되기도 하였다. 물줄기는 하천의 유역권별로 연결하여 표현하였다. 해안의 넓은 하구에서부터 쌍선으로 표현하다가 차츰 좁아져 내륙에서는 단선으로 그렸다. 쌍선으로 표현된 유로는 당시의 수운 체계와 관련이 있다.
한반도의 윤곽은 지금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서해안과 남해안의 경우 비교적 정확하며 북부의 압록강 상류과 동해안의 울진 부근의 실제와 많은 차이가 나타난다. 압록강 상류의 중강진은 실제보다 약 80km 북쪽에 묘사되었으며 백두산도 동북쪽으로 치우쳐 그려져 있다. 울진의 경우 지금보다 내륙쪽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구도』 등 앞서 제작된 필사본 지도와 방안 좌표체계 뿐만 아니라 수록 지명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지도 제작이 목판으로 기획되면서 적지 않은 변화를 시도한 것에 기인한다. 필사본 지도 중 『동여도』(규장각)는 『대동여지도』(1861)와 방안 체계가 동일하나 주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는 목판본 제작의 저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동방여전도』(규장각)는 방안 체계뿐만 아니라 수록 내용도 거의 같다.
지도 제작에 사용된 목판은 숭실대학교에 1장, 국립중앙박물관에 11장이 남아 있다. 피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양면에 판각되어 있다. 목판에 새겨진 글씨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아 여러 판각수가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목판 한 면에 여백이 많이 남는 경우, 이를 이용하여 다른 곳의 지도를 새겼다. 일부 목판에는 한 면에 지도 3-4면이 새겨진 경우도 있다.
『대동여지도』는 국내외 소장기관에서 약 30여 점이 있으며 1864년(고종 원년)에 수정 재간된 지도가 3점이 있다. 『대동여지도』를 필사로 모사한 지도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이는 당시 이 지도를 통해 국토의 상세한 지리 지식이 활발하게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18∼19세기에 들어와 지리 지식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늘어나면서 목판 제작을 통해 지도 보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서양의 지도 제작 기술의 영향을 받아 동판본 지도도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지도들은 당시 조선인들의 지리 지식에 대한 욕구와 그 내용을 잘 보여준다.
「여지전도(輿地全圖)」는 18세기 말에 목판본으로 제작된 것으로 서양식 세계지도와 동양전통의 세계지도를 결합한 지도이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 한성과 팔도관찰사영의 북극 고도, 즉 위도와 동서 경도를 서울을 기준으로 표시하고 있다. 1834년에는 최한기가 「지구전후도」를 목판으로 제작하였다.
중국의 장정병(莊廷甹)의 「지구도」를 목판으로 중간한 동서반구도이다. 지구 후도의 좌측 하단에 ‘도광갑오맹추태연재중간(道光甲午孟秋泰然齋重刊)’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834년(순조 34)에 중간했음을 보여준다. 태연재(泰然齋)는 최한기의 당호이며 이 지도를 판각한 이는 김정호이다.
1860년(철종 11)에는 「곤여전도」가 판각되어 보급되었다. 1674년 페르비스트 제작한 이 지도는 1856년 중국 광둥[廣東]에서 재판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중간(重刊)한 것이다. 적도상에 시점을 둔 평사도법으로 동서 양반구를 분리하여 그렸다. 동반구에는 아세아(亞細亞), 구라파(歐羅巴), 리미아(利未亞;아프리카), 서반구에는 남 · 북 아메리카(亞墨利加)가 그려져 있고, 남방대륙은 양반구에 걸쳐 있다. 곤여전도 목판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다(보물, 1986년 지정).
목판으로 제작되어 널리 보급된 조선지도로는 「해좌전도(海左全圖)」와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가 있다. 「해좌전도」는 세로 98cm, 가로 56cm 크기로 제작되었으며 가채(加彩)되어 있다. 지리 정보는 정상기의 「동국지도」의 조선 전도를 수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제작 시기는 1857년-1859년 사이이며 3가지 판본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여백에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의 행정구역과 울릉도, 대마도, 제주도 등의 섬에 관한 역사 및 지역 정보가 수록되어 있어 지도와 지지의 결합이라는 전통적인 지리지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대동여지전도」는 『대동여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축척 약 92만분의 1로 제작된 지도이다. 제작자와 제작 연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표현 방법은 『대동여지도』와 유사하여, 산줄기를 선으로 표시하면서 그 굵기와 톱니 모양의 산형의 표시로 산맥의 대소를 가릴 수 있게 하였다.
지도의 보급은 한글 지도, 동판본 지도 및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890년대에는 19세기 중반에 목판본인 『수선전도(首善全圖)』(보물, 1986년 지정)를 바탕으로 「슈션전도」(연세대학교 박물관)가 제작되었다. 수록 지명은 현지에서 부르는 지명을 기재한 것으로 보아 제작자는 서울 지명에 대해 많은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900대 초에는 한자와 한글 지명이 병기된 「한성부지도」가 제작되었다 이 지도는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트랜스액션(Transaction)』에 소개한 이후 널리 알려진 지도이다. 개화기 이후 근대화가 진행되던 서울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동판지도로서 대표적인 지도는 『접역지도(鰈域地圖)』(영남대박물관)이다. 조선전도인 「대조선국전도」와 도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제호의 ‘접역’은 우리나라 근해에서 가자미(鰈)가 많이 난다는 중국 한서(漢書)의 고사에 의해 붙여진 우리나라의 별호이다. 지도 내용은 「해좌전도」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동판으로 제작하면서 새로운 내용들이 삽입되어 있다.
1896년 학부편집국에서는 「오주각국통속전도(五州各國統屬全圖)」(서울역사박물관)를 목판본으로, 1902년에는 「세계전도(世界全圖)」를 동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전도인 『대한여지도(大韓輿地圖)』와 「대한전도(大韓全圖)」(서울역사박물관)를 동판본으로 제작하였다. 「대한전도」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위해 제작한 200만분의 1 지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경위선을 삽입하여 그린 발간한 지도로 평가 받고 있다.
1897년 고종은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였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국가 조직을 재편하고, 근대적인 도시 계획을 실시하였고 이듬해인 1898년에는 현대 지도 제작을 위해 측량을 담당하는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였다. 미국의 측량기사 레이먼드 크럼을 초대 수기사(首技師)로 고용하여 측량을 실시한 것이 우리나라 근대적 측량의 효시이다.
당시 양지아문에는 총재관 3명, 부총재관 2명, 기사원 3명, 서기 6명을 두어 전국의 측량을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이듬해에는 측량에 종사할 실무진으로 각 도에 양무감리(量務監理)를 두고 현직 군수나 측량에 밝은 사람을 선임하여 측량 및 양안(量案) 작성을 책임지게 하였다. 양지아문은 전국 124개 군의 측량을 실시하였으나 1901년 사업이 중단되면서 3년만에 폐지되었고, 조직은 지계아문(地契衙門)에 병합되었다.
1903년 지계아문은 탁지부(度地部)로 통합되었고, 이듬해양지국(量地局)으로 개편되었다. 1905년에는 탁지부 사세국(司稅局)에 양지과가 설치되고, 일본인 측량기사를 고용하여 측량기술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지도 제작을 위해 이와 같은 조직이 만들어졌으나 전문적인 기술은 외국인들을 고용하여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이 이와 같이 근대 측량기술의 도입이 늦어진 사이 일본을 비롯한 외국 열강들은 해안을 중심으로 조선을 측량하였다. 영국, 러시아, 미국 등이 이미 조선의 해안지대를 수차례에 걸쳐 측량하였으며 일본은 1877년 내전이 종식되면서 조선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정부 조직에 지도 제작을 위한 전문기관을 설립하였고, 첩보활동을 통해 조선의 지도를 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측량이 본격화되고, 1895년부터 1910년까지 여러 차례의 간첩활동을 통해 지리정보를 수집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되어 국권이 강탈되면서 한반도를 대상으로 한 근대식 지도 제작은 일제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본은 이전에 확보한 지리 정보를 바탕으로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측량과 지명 조사를 바탕으로 1914년에서 1918년 사이에 우리 나라 전역에 걸친 722매의 「1:50,000 지형도」를 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부 도시지역을 대상으로 1:25,000, 1:20,000, 1:10,000의 지도도 부분적으로 작성하였다. 1930년대 후반기부터는 군사적인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실시했으며, 측량 성과는 비밀문서로 다루어지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되면서 9월 미군정청은 일본 육지측량부로부터 「1:50,000 지형도」의 원판 722매 와 조선총독부에서 사용하던 ‘조선 삼각점 및 수준점 성과표’ 등 측지 자료를 인수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내무부 토목국에서 이들 지도의 원판을 인계받았다. 그러나 9월 측지 업무는 국방부로 이관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측지 사업의 필요성과 시급함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기술과 장비의 부족으로 인하여 미군의 지원을 국방부를 통해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측지업무는 육군 공병관실에서 관장하게 되고, 이어서 지도 제작을 전담하는 측지부가 신설됨으로써 비로서 우리나라에서 지도 제작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일제강점기에 제작한 지도에 지명을 한글과 영문으로 번역하여 수록한 군사용 지도가 제작되었다. 휴전 이후에는 미국의 협조를 통해 측지사업을 실시하였다. 1958년 4월에는 국방부 산하에 지리연구소가 설립됨으로써 국가의 측량 및 지도제작을 전담하였고 측량 기준점과 지명의 조사 및 정비사업을 수행하였다. 지명 정비를 위해 1958년 중앙지명제정위원회와 지방의 각급 지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61년 2월 국방부 지리연구소는 내무부의 토목시험소와 통합되어 내무부 산하 국립건설연구소로 되어, 이전의 지리연구소의 업무를 인계받아 지도 제작 업무를 전담하였다. 국립건설연구소 설립은 군사용 지도와 민간용 지도의 제작이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지도의 보급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5 · 16 이후 경제개발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형태의 지도가 필요하였으나 종전의 지도제작 방법으로는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1967년부터는 항공사진 측량에 의해 우리의 손으로 국가 기본지형도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1974년에는 국립건설연구소의 측지부가 독립기관으로 분리되어 국립지리원이 되었다. 이후 다양한 축척의 지도 제작이 완료되었다. 지도 수요의 확대와 함께 각종 주제도가 제작되었고, 1:5,000의 세밀도도 완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도의 수정작업과 함께 지명의 정비 사업이 동시에 수행되기도 하였다.
지도의 수요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지도의 사회화 과정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지도가 단순히 지리의 위치 정보만 전달하는 기능에서 벗어나 분석을 통하여 주제도를 제작하여 국가와 사회의 수요에 충족하고자 하였다. 이의 대표적인 사업이 『국가지도집(National Atlas)』 발간이다.
『국가지도집』은 중앙정부가 발간의 주체가 되어 자국을 대상으로 특정 시기의 자연, 인문정보을 종합적으로 수록한 지도집으로 국가의 정체성과 지향하는 이념을 담기도 한다. 1989년에 발간된 『대한민국국세지도』에 이어 2008년에는 대한지리학회가 주관하여 『국가지도집』을 국문과 영문판으로 편찬하였다.
중등 교육용으로 다양한 지리부도가 제작되었으며, 지방정부와 민간 차원에서도 여러 형태의 지도집이 출간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지도를 통해 주제도를 제작하였고, 『한국고고학지도』, 『한국언어지도』, 『한국의 석회암지형』 등 특정 주제를 대상으로 한 지도집이 편찬되었다. 지방 문화유적 조사와 발굴 사업이 활발해 지면서 유적 지도의 발간도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지도집 편찬에 있어서 주목되는 것은 고지도를 주제로 한 지도집의 발간과 고지도 정리 사업이었다. 도록집 발간은 1977년 한국도서관협의회에서 발간한 『한국고지도』가 효시였다. 1994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전술한 『한국 고지도 목록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전국 23개 기관에 소장된 고지도를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1991년에는 범우출판사가 『한국의 고지도』 를 발행하였다. 이 책은 고지도 연구의 전환점을 이룬 도록집으로 2005년에 일문판과 영문판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2000년에는 대학지리학회가 『한국의 지도』(한 · 영판)를 발행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문화와 장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각 지역을 그린 고지도가 도록으로 간행되었다. 광역자치단체에서 주관하여 편찬되 것으로는 『서울의 옛지도』(1995,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제주의 옛지도』(1996,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 『경기도의 옛지도』(2005, 경기문화원), 『부산고지도』(2008)가 출간되었다.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서 고지도 문화재 지정사업을 실시하여 이를 종합한 『한국의 옛지도』(2008)가 있다.
1980년대 이후 경제가 성장하고 도로망과 자동차 보급이 이루어지면서 종래 정부기관이나 기업에서만 요구되던 지도의 수요는 개인으로 급격히 확대되었다. 여행과 답사의 붐이 일면서 관광안내도와 도로 교통지도가 출간되면서 민간인 지도 제작업체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초기에는 지도 제작업체에 의해 제작된 도로교통도와 관광지도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역의 홍보 일환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2003년 국립지리원은 국토지리정보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지도 제작기관의 명칭이 바뀌는 것은 지도의 의미가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 즉 종래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는 것에 치중하는 데에서 벗어나 GIS와 GPS를 통해 종이 지도를 수치 지도로 디지털화하고, 지리 정보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지도가 지니는 정보 전달자로서의 기능을 강화한 것이다.
GIS는 위치 정보의 표현 뿐만 아니라 정보를 분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리 정보의 의미를 확대시켰다. 특정 지역에 대한 위치 정보와 각각의 속성에 대한 정보를 함께 보여줌으로써 공간패턴과 프로세스를 검색하고 분석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지리정보의 수요가 확대하고 특히 수치지도가 연구소와 대학에 보급되면서 GIS의 연구 범위는 급속히 넓어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GIS와 정보 통신 기술의 통합으로 새로운 다매체 융합 지도로 진화되었다. 인터넷 포털에서 제공하는 웹 지도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자동차 내비게이션 시스템으로 사용되는 전자도록지도 등의 다양한 인터넷 지리정보 서비스에서 사용자들은 수동적인 정보 이용자에서 점차 지도 제작자들에게 자신들의 정보 욕구를 반영시키는 능동적인 정보 창조자로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인터넷 기술과 스마트폰의 도입, 이용자들의 변화는 기존의 GIS와는 다른 웹 2.0 패러다임을 통해 지리 정보의 구축과 활용에 사용자의 참여를 강화하여 정보의 개방성과 공유성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지리 정보의 표현이 평면에서 입체지도로 변화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지도 표현도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