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이나 재난 등의 불행을 사전에 예방하고 한 해 동안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벽사적(辟邪的)이고 기복적(祈福的)인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새해 첫날의 세시풍속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문짝에 주로 붙이기 때문에 문배(門排) 또는 문화(門畫)라고도 하였다. 중국에서 서기전부터 집안으로 들어오는 악귀를 쫓기 위해 문신을 대문에 그려 붙이던 주술적 관습이 6세기경 정초의 연례행사로 정착되면서 유래된 것이다. 명대(明代) · 청대(淸代)를 통하여 연화(年畫)로 크게 유행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풍습화되어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궁중 풍속으로 시작되어 점차 민간층으로 확산되었다. 농촌보다는 정교한 대문을 가진 서울 등의 도시 주택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그림의 내용으로는 신라시대 이래로 역귀(疫鬼)를 쫓는 벽사신인 처용(處容)이 조선 초기에 제작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주로 중국의 도교와 관련된 문신들이 많이 그려졌다.
대궐문 양쪽에는 당나라 장군인 진숙보(秦叔寶)와 위지공(尉遲恭)에서 유래된 금(金) · 갑(甲) 두 장군상을 한 길이 넘는 크기로 그려서 붙였다. 중문과 곁대문 등에는 붉은 도포에 검은 사모(紗帽)를 쓴 위정공(魏鄭公)과 종규(鍾馗)가 귀신 잡는 형상을 붙이기도 하였다. 일반 민간에서는 동물 중에 벽사력을 많이 지닌 것으로 믿어오던 닭과 호랑이를 비롯하여 해태 모양의 사자와 개를 그려 붙였다. 삼재(三災)가 든 해에는 특별히 매 그림[鷹圖]을 대문 등에 붙였다. 그리고 기복적인 송축 등으로는 장수를 상징하는 수성(壽星)과 선녀 그림을 비롯하여 길상적(吉祥的)인 성격을 지닌 인물 · 화훼 · 누각 등을 그렸다.
궁중에서 사용하는 것은 도화서(圖畫署)에서 제작하여 12월 20일경 진상하였다. 그리고 이를 우열별로 등급을 나누어 각 전(殿)과 종실, 재상과 근신들에게 하사하였다. 도화서에서 매년 12월에 진상하는 수량은 조선 초기에는 60장 가량이었다. 그러나 연산군 때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중종 연간에 이르러 신하 한 사람당 20장씩 하사할 정도로 많은 양이 제작되었다. 이를 위하여 임시로 고용된 차비대령(差備待令)의 화원이 각각 30장을 그렸다 한다. 그리고 도화서 소속 화원들은 각기 20장씩을 그렸다. 제작 기간은 1, 2개월에서 길게는 3개월이 걸리기도 하였다.
지방 관아에서 소용되는 것은 그곳에 소속된 화원들이 제작하였다. 그리고 일반 민간인들은 지물포 등에서 주로 구입하였다. 짙은 회색을 사용하여 장식성이 강조되었고, 창조성보다는 본보기 그림에 의하여 되풀이되어 그려지면서 도식화된 양식이 인습적으로 계승되었다. 오늘날 세화는 민화의 범주로 분류되고 있으며, 해마다 새로운 것으로 갈아 붙였기 때문에 오래된 유물이 드물다.